전북 완주군 모악산 골짜기,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여덟 해째를 홀로 살아오고 있는 시인 박남준의 에세이. 박남준 본인이 직접 그린 정감 있는 삽화를 함께 싣고 있는 이 에세이는, 복잡한 현대문명과 어려운 경제상황에 찌들어 점점 더 각박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충만함과 무욕의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전해 주는 감미로운 편지와 같은 작품이다.
시인 박남준. 그를 가리켜 어떤 이는 '낭인(浪人)'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전라북도 예술가'라고도 부른다. 방랑 기질을 지닌 그의 삶과 팔방미인 격인 그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산 데서 일컫는 이름일 터이다. 법성포에 사는 일흔 넘은 그의 홀어머니께서 손수 지어주신 한복을 입고 사는 그는, 땅에게 죄를 짓고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조그만 텃밭에 열무나 배추 심고 자신이 좀 덜 먹더라도 애벌레들이랑 같이 먹고 애벌레들이 많이 먹으면 자신이 좀 덜 먹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환경이니 생명이니 뭐 그렇게 요란하게 떠들지는 않는 사람, 박남준은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친구인 유용주 시인은 "박남준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연간 에너지 소비량이 가장 적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가 살고 있는 모악산방은 황토벽에 슬레이트를 얹은 오두막이다. 마당에는 봉숭아 이 피어 있는 화단이 있고 그 너머에는 감나무숲을 두르고 있으며, 옆으로 시원스레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다. 툭툭 이따금 떨어져 내리는 감 소리에도 쿵 하고 가슴 아파하고, 감잎 우수수 져내리는 외딴 집에 홀로 앉아 씁쓸한 웃음 짓는 그가 쓴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는 볕 좋은 날 그가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고요한 눈부심을 발한다. 1980년대에 쓴 그의 시가 그 세대들이 꿈꾸었던 변혁에 대한 표현이었다면, 1990년대를 마감하는 지금 이 작품은 이기적인 일상의 삶을 반성하고 정신의 때를 씻어 맑고 넉넉한 품으로 감싸고 있다.
"북으로 북쪽으로 이어진 해안을 따라갈수록 흰 빨래처럼 정결하게 걸려 있는 오징
어 건조대를 보며 나의 삶도 저처럼 푸른 바닷물에 씻어 세상의 바람 끝에 걸어놓고 싶다는,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본문 13쪽 중에서)
박남준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출생하였고, 1984년 <시인>지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는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등이 있다.
세속에 띄우는 山中편지.. 박남준 `작고 가벼워 질때까지'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는 것이 견디기 힘들 때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훌쩍 혼자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온갖 인간관계, 생활의 짐, 나를 얽어매고 있는 질긴 끈들을 벗어나 떠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시인 박남준(朴南濬·41)은 그렇게 했다. 8년 전 그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모악산 한 외진 구석에 쓰러져가던 무가(巫家)로 갔다. 말 그대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갔다.
총각인 그는 그곳에서 쌀과 된장만으로 밥해먹고, 개울의 버들치와 산중의 칡넝쿨, 물가에 핀 물봉선을 자기 새끼이자 친구 삼아 8년여를 보냈다. 실천문학사가 펴낸 그의 글과 그림이 담긴 산문집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는 그간의 산중생활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생각들을 담은, 세속에 보내는 편지이다.
"칠 년이 되도록 이 산중에 사는 것도 미안한 일이어서 그간 삭정이나 죽은 나무들 그리고 솔잎 떨어진 것들을 갈퀴로 긁어서 견뎌왔는데 생나무를 베어 장작을 하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나무를 베면서도 이거 내가 죄를 짓고 있지 죄를 짓고 있어, 살아 생전 이 많은 죄며 빚을 어찌 다 갚고 가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곤 했다. 서툰 도끼질을 하다 장작이 튀어 정강이라도 되게 얻어맞으면 그래 이거 벌받는군, 벌받아 싸지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글로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이들도 많고, 오지여행이라도 한번 갔다 오면 해탈했다는 포즈를 취하는 이들도 많은 세상이지만 박씨의 글은 그의 생활 자체처럼 소박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햇빛 보고 눈 비비고 채마밭 가꾸고, 산나물 캐고 시 쓰고, 잠 안 오는 밤이 면나무나 고무판을 쓰걱거려 판화를 그려보는 것이 생활의 전부다.
그러는 사이 그의 생활이 입소문으로 알려져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도 찾아온다. 찾아와서는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물을 때가 그는 가장 난감하다. "내가 무슨 선지식(善知識)이라고… 그냥 살 뿐이지요." 문우들이 이름붙여 준 「모악산방(母岳山房)」에 손님이 오면 내놓을 것이라고는 녹차밖에 없는 그는 가마솥에 밥하고(쌀이 있을 경우에만) 하루에도 대여섯 번 손님 대접하느라 차를 마신다. 배낭 하나밖에 안되던 짐은 사람들이 주고 간 가스렌지와 전기밥솥으로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장작불로 밥을 짓는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그랬다고 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약재라도 내가 정성을 들여 다린 값싼 약재만 못하다. 어머니의 정한수같이 내 삶을 정성스럽게 한다면 나 자신이 바뀔 것입니다."
84년 등단, 90년에 첫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를 낸 뒤 모악산으로 떠난 박씨는 그곳에서 두 권의 시집을 일궜다. 늘 입고 지내는 한복 윗저고리는 고향 전남 법성포에 계시는 어머니가 바느질해 주신 것. 인근에 사는 문인 김용택 이병천 등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풀여치'이고 '전주의 눈물'이다. 유난히 여려 불쑥불쑥 눈물 흘리는 그의 심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1998. 10. 13 한국일보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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