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말솜씨로 남성적 체취를 뿜어내는 한창훈, 그가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온 섬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낸 산문소설. 거문도의 자연과 사람살이의 모습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바닷사람, 섬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강인한 우리네 삶의 미학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작품.
*간행물윤리위원 추천도서
어린 시절을 보낸 거문도. 그곳은 선장을 하던 외삼촌과 외할머니가 아직도 살고 있는, 한창훈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섬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안에 눈물겨운 삶이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광활한 바다와 싸우다 사라져버린 이들과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끈을 한시도 늘어뜨리지 않던, 사투로써 광휘를 발한, 내 어머니의 가족을 포함한, 섬의 주민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라고 씌어진 한창훈의 후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섬'에 애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바다를 소재로 한 많은 책들이 관념적으로 흐르는 데 비해, 한창훈의 『바다도 가끔은…』은 바닷사람, 섬사람 들의 일상을 통해서 강인한 우리네 삶의 미학을 찾아내는 진솔한 작품이다. 삶의 뼈저림과 고단함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섬사람과 그들의 생활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 거문도행 여객선에서 내리는 것에서부터 이 글은 시작된다.
"항구의 아침은 물색이 바뀌면서 온다. 어슴푸레한 기운이 사방에 퍼지면 밤새 도시의 불빛에 반짝이던 검은 바다는 점차 제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색이 넓게 퍼지면서 언뜻 황금색도 비친다. 항구의 바다답게 기름띠가 흘러, 보는 각도에 따라 온갖 잡색이 다 나타난다. 가장 부지런한 것은 역시 새다. 갈매기가 벌써부터 어지럽게 난다.…" 끼르룩거리는 갈매기를 보며 옛날 초등학교 시절을 추억하고, 폭풍과 태풍 때문에 공포에 떨던 그 시절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 집들 배들이 모두 개미처럼 바닷속으로 빠져 뒤엉켜 흩어지며 없어져버린다는 말인가. 그렇지, 그 말이겠지. 우리가 살았던 섬도 없어져버린다는 말인가. 딱딱한 돌바윈데? 돌로 되었으니까 섬은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섬만 남으면 뭐 하는가, 사람들이 모두 바다로 쓸려 가버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또 살아? 집 짓고 밭 만들고 학교 짓고 고기 잡으며 살아? 살다가 어느 날 또 해일이라는 것이 와서 쓸어가면, 또 죽고. 또다시 와서 살고. 그럼 뭐하러 산단 말인가…."
물해꾼(잠녀)인 외할머니를 통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단면과 시대의 아픔을, 선장이었던 삼촌을 통해서는 여객선의 변천과 항구의 모습을 추억하며, 낚시의 변천과 익숙지 않은 바다의 먹거리도 소개된다.
"갈치의 달콤함과 엉겅퀴의 쌉싸래한 맛이 조화를 이루고 고기의 부드러움과 나물 가시의 까슬까슬한 느낌이 희한하게도 맞아떨어지는 항각구국. 섬을 떠난 노인네들이 허전함에 지쳐 속이 헛헛해지면, '항각구국이나 한 그럭 씨원하게 묵었으믄 좋겄다' 하고는 막연히 거문도 쪽을 바라보면서 "오매 오매 내 삼도야(거문도의 옛 이름)" 한탄조 한마디씩 내뱉는 것이다…."
쉰 네 가지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는 갈치배와 여객선, 항구, 등대 등 거문도와 관련된 화보들이 재미를 더하고 있다.
"거기에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물이 흐를 때는 흐름을 거슬러 길게 원을 그리며 가는데 나는 숱하게 배를 탔으면서도 급하니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사람을 통 못 봤다. 노질 자체가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 안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느려야 할 때는 느릴 줄 알았다. 물살보다도 더 느리게. 바람보다도 더 천천히. 그걸 아는 사람만이 빨라야 할 때를 잘 안다…."
한창훈
1963년 전남 여수 출생으로, 여천군 거문도와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의 삶을 빼어나게 형상화한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 1998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주요작품으로는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장편소설 『홍합』 등이 있다.
거친 자연에 맞선 거문도사람들의 얘기
바다를 3면에 접하고 있는 반도국가인 것이 무색하게 한국출판에서 바다를 소재로 한 책은 의외로 드물다. 바다를 소재로 한 대중적인 저작은 한승원 이청준 박상륭 씨 등의 단편 몇 편과 천금성씨가 펴낸 '해양소설' 정도를 들 수 있다.
신간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는 남해의 외딴섬 거문도를 중심으로 한 바다이야기다. 거친 자연에 맞서서 삶을 일궈낸 바다사람들의 삶이 눈에 잡힐 듯이 그려진다. 남성적인 필체를 자랑하는 저자 한창훈 씨는 98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신예작가. 책은 산문소설이란 이름에 걸맞게 각 주제를 짧은 소설형식으로 실어 읽기 쉽게 만들고 있지만 자전에세이로 읽어도 무방하다. 저자는 거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경험을 살려 전설과 일화,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어지는 섬 생활의 변화를 섭렵하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여름 휴가지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1885년 4월)등으로만 알려진 거문도에 대한 저자의 전방위적 관심은 책이 기록적 가치까지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거문도에서 10세까지 살았다. 섬을 떠난 뒤에도 세파에 지칠 때나, 쉬고 싶을 때 항상 찾아간 곳이 거문도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저자의 입담이다. 갯내음 풍기는 바다사람들의 거친 말투가 저자의 글발에 실려 생생하게 전해온다.
이른 아침 항구를 메우는 통통배 소리를 담은 글 '잠을 깨우는 아련한 소리, 통통통'은 섬의 일상을 그리는 압권의 문장이다."참으로 그리운 소리 통통통. 섬과 섬 사이에 가득하던 그 소리들. 마치 꼬마들이 달려가는 소리 탕탕, 뒤란에 감 떨어지는 소리 통통, 흡사 양철지붕에 소나기 내리는 소리 토도도통. 어쩌면 개살구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 팅팅. 간혹 아이고 이놈의 먼지 좀 봐라. 엄마가 아이 엉덩이 때리는 소리 텅텅. 그 중에서도 고무공 튀는 소리 통통통." 흥미로운 기록 중의 하나는 옛날 거문도가 서해와 동해를 이어주던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울고 간다 울릉도야, 앓고 간다 아랫녘아'란 글이다. 옛날 거문도 사람들은 굵고 단단한 참송을 구하러 울릉도까지 갔단다. 한번 가고 오는데 반년이나 걸렸다. 군
산에서 쌀을 싣고 울릉도까지 가서 나무와 바꿔왔단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환상여행을 보여주는 듯한 옛사람의 교통을 그리는 글이다.
그밖에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귀신'이란 글은 거문도 바다에 떠도는 귀신에 얽힌 전설과 섬사람들의 실체험을 교차시켜 적은 글로 환상적인 짧은 단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아름다운 에세이다.
--- 문화일보 리뷰 배문성 기자 (1999년 10월 20일 수요일)
섬과 바다에 대한 열애기
소설가 한창훈(36)에게 섬은 고향이자 놀이터였고 학교였으며 정신의 모태였다. 그가 섬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안에 "눈물겨운 삶이 있기 때문"이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생후 팔 개월에 뱃길 117㎞를 따라 거문도로 간 그는 열살까지 살았던 그곳에서 "말이나 생각이나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히기 전에 바다를 바라보는 버릇"을 키웠다. "변하지 않는 저 바다… 그것처럼 한결같은 게 또 있을까" 싶어 꿈에도 찾았던 섬들과 조우하며 그는 "오매 오매 내 삼도야, 오매 오매 내 천금아"를 부른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는 이제 뭍으로 나와 머리가 큰 뒤 신산한 인생항로를 따라 떠돌고 있는 그가 다시 섬, 자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헤집어본 섬과 바다에 대한 열애기다. '나그네는 다시 섬으로 들어간다'는 발문으로 시작하는 이 기행문이 때로 풍물지가 되고 때로 섬 민중사가 되고 때로 맛기행이 되는 까닭은 그만큼 그가 거문도에 바친 순정과 섬에서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수-거문도를 오가는 정기여객선 순풍호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 작가가 추억을 더듬으며 거느리는 생각은 "아, 세상이란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였다.
"그 섬은 다름 아닌 내가 꿈에서 꾸었던 바로 그 섬인 것이다. 청춘의 피폐와 외로움에 지쳤을 때 본능적으로 찾았던 곳. 환상의 장소. 내 자의식의 공간."
글 사이사이에 저 멀리 수평선 위 한점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바다와 섬 사진은 작가 뒤를 좇아 거문도에 내린 우리 마음 끝을 아릿하게 적신다.
--- 한겨레21 정재숙 기자 (1999년 11월 4일 목요일)
유년의 기억 가득한 거문도로 자맥질
소설가 한창훈에게 거문도는 냄새 몇 가지로 다가온다. '어머니가 밥 지으며 아궁이에 동생의 속옷을 말릴 때 나는 냄새, 콩가루에 밥을 비벼 먹을 때마다 나는 냄새, 그리고 바다 냄새. 아침에 운동장에 돌라서면 사방 바다에서 불어오는 그 맑은 냄새...
그가 산문 소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에 퍼뜨린 '글의 향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다냄새를 좇아, 자가는 열살까지 살았던 거문도 유년의 기억 속으로 첨벙 자맥질해간다.
단지 냄새뿐일까. 육지로 나간 노인들에게 '오매 오매 내 삼도야'탄식을 내뱉게 하는 거문도식 갈칫국 '항각구국', 고사리 녹두나물을 넣고 끓인 붕장어탕, 살살 녹는 삼치회. 그 군침도는 기억들.
큰 바위 옆 몽돌밭에서 여인네들이 깔깔거리며 물장난을 치던 장면의 가슴 설레는 기억. 마을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떠돌며 때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던 귀신 이야기... 유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은 색상을 띠게 마련.
떠난 사내의 회고담일지라도, 거문도 이야기에 역사의 상흔이 비켜갈 수는 없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에 대해서도 작가는 할말이 많다. 영국 여왕이 다녀갔는데 왜 사과 한마디도 없었을까...
---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 (1999년 10월 3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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