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작가 박일문의 추억 여행. 운명이 한 소설가에게 짐 지어 준 삶의 행로를 신방을 엿보듯 만나며 어느 새 자신의 유년의 추억을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잃은 것을 찾아가는 소중한 기억의 보고(寶庫)
박일문의 추억 여행은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가 뿌리 깊이 감춘 풋풋하고 따뜻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들추어내는 과정이며,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근본에 가까워지려는 때묻지 않은 인간상의 발견이다.
그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 만큼 그의 마음에서는 고민과 시련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고뇌의 주변에 놓여 있던 인물들과 사건의 기억들은 그에게 항상 따스함과 아늑함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이 책은 모든 것이 속도와 승패 속에서 가늠되어지는 오늘날에 우리가 잃은 것들을 찾도록 하여 준다.
희미한 할머니의 손길에서 달콤한 첫사랑의 거짓말까지
이 책은 "내 최초의 기억은 대청마루에서 엉금엉금 기던 기억이다"로 시작한다. 단편 단편으로 남은 기억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쫓아가는 추억 행위는 우리가 잃었던
많은 것들을 재생시켜 준다. 그리고 가쁜 세월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회와 정서를 다시 찾아주는 과정이다. 그래서 박일문은 아장아장 걷던 최초의 여행길과 사랑채에 드나들던 사람들,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누워 있던 죽부인과 키 큰 수수밭을 지날 때의 느낌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준다. 두꺼비집이며 반딧불이며 처음 먹어 본 김밥에 대한 기억은 그만의 기억은 아닐 것이다. 또한 감나무 우거진 돌담길을 걷던 기억과 따르던 삼촌이나 누나가 곁을 떠나던 순간,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밤을 뒤척이던 순간을 잠시 접어둔 기억의 서랍 속에서 꺼내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작게 또는 크게 영향을 주며 스쳐간 것들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사물 그리고 사건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문득 아무런 이유나 까닭 없이 들이닥치는 쓸쓸함과
아픔 같은 것, 우리가 누구나 몸살처럼 되게 앓고 지나가는 것들을 그는 다시 매만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흉터에 피가 돌 듯이 살아나는 살들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운명적 소설가' 박일문의 과거로의 여행
박일문의 지적 방황이 만만치 않은 여정을 지니고 있음은, 그의 오랜 절간 생활과 승려 생활, 그리고 종교적 편력을 통해 이미 알려진 주지의 사실이다. 한 소설가의 생애를 따라가는 과거로의 여행이 가져다주는 부담 없는 인생사에 대한 추적이 선물하는 사색은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가벼운 에세이의 차원을 넘어, 끝내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첫사랑의 고백을 뒤늦게 듣는 것과 같은, 또는 자백이 너무 늦어버린 범죄자의 후일담에도 빗댈 수 있는 쓸쓸함과 감동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운명이 한 소설가에게 짐 지어 준 삶의 가난함과 신산함을 신방을 엿보듯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동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집에서 들고 나간 의자는 내 키에 비해 커서 나중에는 할아버지가 의자 다리를 조금 잘라 내 키에 맞게 만들어 주셨다. (중략) 노을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삶을 무상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출생과 죽음은 영원히 반복되며 항상 새로이 한 생명이 탄생할 때마다 새로운 삶의 고통도 더불어 태어난다.(「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부분)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체험은 동적 체험보다는 정적 체험이 앞선다. 그러한 체험은 훗날의 박일문을 규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때묻지 않은 기억을 복원해 낸 박일문의 삶
우리에게 너무나도 낯익은 이름이면서도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던 작가 박일문, 그의 모습을 우리는 비로소 온전하게 만나게 된다.
"형 그 동안 어디 갔다왔어"하고 물으니, 형은 어눌한 목소리로 지역 박물관이나 김삿갓 묘지를 몇 번 갔다왔다고 말했습니다. 시인 김삿갓, 소설가 박일문…… 외로움, 고독, 시련, 삶의 정처 없음……
저는 이 두 사람에게서 어떤 가족 유사성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형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뭇가지 끝,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마냥 세상에 애처로이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함민복, 발문 중에서)
세상의 돈과 권력의 냄새가 닿지 않는 곳, 또는 산업화가 생산한 소음이 닿지 않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가 바로 박일문일 것이다. 그것이 비록 짙은 암울함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는 형상일지라도 아직 세태의 이기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해악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한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문단이 여전히 희망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박일문
1959년 경북 상주 출생으로, 영남대 법대를 졸업했다. 199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에 단편 「왕비를 아십니까?」가 당선되었고, 같은 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제16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병영일기』, 『함께 보낸 날들』, 장편소설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 『장미와 자는 법』 『적멸』, 『달은 도둑놈이다』 등이 있다.
1. 최초의 기억
2. 아장아장 여행길
3. 고요한 집
4. 사랑채
5. 부채
6. 첫사랑, 첫불
7. 죽부인
8. 키 큰 삼밭이나 수수밭을 지나면
9. 삼베
10. 두꺼비집
11. 반딧불이
12.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랑의 차이
13. 처음 먹어본 건빵
14. 강 어귀
15. 정님이 고모, 도깨비 치마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유명한 작가의 자전적 산문소설. 한 소설가의 생애를 따라가는 과거로의 여행담이다. 아장 아장 걷던 최초의 여행길과 사랑채에 드나들던 사람들,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누워있던 죽부인과 키 큰 수수밭을 지날 때의 느낌. 두꺼비집이며 반딧불이며 처음먹어본 김밥에 대한 기억,감나무 우거진 돌담길을 걷던 기억과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밤을 뒤척이던 순간을 기억의 서랍속에서 꺼내본다. 마치 자백이 너무 늦어버린 범죄자의 후일담을 읽는 듯한 쓸쓸함과 감동이 느껴진다.
--- 국민일보 신간 (2000년 11월 21일 화요일)
손에 잡힐듯 아련한 유년기의 추억
한겨울 교실 난로 위의 도시락. 어떤 아이는 데워지지 않을세라, 어떤 아이는 밥이 타버릴세라 걱정에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고향 집 푸른 이끼 낀 기왓장, 시냇가 버들강아지의 하얗고 보드라운 솜털...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아련한 유년의 추억들. 40대 작가 두 사람이 아스라한 기억의 비늘을 주워모아 책으로 엮어냈다. 각각 에세이와 산문소설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지만, 겨울 느티나무 '테레비' 등 등의 키워드를 통해 기억의 찌를 드리웠다 낚아올리는 솜씨는 비슷하다.
구효서의 에세이 '인생은 지나간다'는 강화도 한촌에서 보낸 60년대 유년기의 추억담이다. 때론 한밤중의 방사(房事)까지 확성기 오동작으로 집집에 중계되던, 정겨우면서도 미소를 지닌 마을.
작가는 어느날 정확한 출생시각을 알고자 폐가가 된 고향집을 찾는다. '아침볕이 막 문턱에 닿고 있었다'라는 어머니의 회상만을 단서로. "아침볕이 내 이마와 어깨 위에 떨어져 내렸다. 눈이 부셨고 어깨가 따뜻해졌다. 어디선가 뎅, 하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이 부셔서인지 몰라도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
작했다..."
박일문은 산문소설 '추억'에서 불씨를 가지고 놀다 집을 태울 뻔한 기억, 여인네들의 겨울철 뜨개질, 작가의 영혼을 포로로 만들었던 그리운 여선생님 등 경북 상주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띄워올린다. "오십이 되면 절로 들어갈란다"라고 뇌까리던 아버지, 작가 자신의 출가생활 등이 책 곳곳을 수놓는다.
---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 (2000년 11월 2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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