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소설

유령의 자서전 (2003)

실천문학 2013. 8. 5. 14:57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소록도 한센병자들의 유토피아에의 열정과 자유 의지를 드러낸 소설이었다면, 류영국의 『유령의 자서전』은 이 땅에 실재했던 한센병자의 삶과 역사를 가장 진실에 가깝게 그려내면서 그 고통과 해원의 본질에 한층 더 다가간 소설이다. 이 땅 어디에도 살아갈 곳이 없었던 한센병자의 끈질기면서도 처절한 투병과 생존의 모습을 통해, 한 인간이 허물어져가는 몸과 싸우며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과정을 감동 깊게 체험하게 된다.


『유령의 자서전』은 내용과 기법에서 우리 소설의 한 정점(頂點)에 도달해 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공은, 한계상황에 내던져진 한 인물의 생애가 주인공 자신의 내면적 시각과 작가의 객관적 시각이 수시로 교차함으로써 하나의 실존으로서 옹글게 포착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치열한 작가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월까지』(전3권, 1억원 고료 국제신문 주최 국제문학상을 수상)로 등단하여 탄탄한 구성력과 문장력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 류영국은 8년여에 걸친 끈질긴 취재와 고증을 거쳐 원작을 세 차례나 대폭 개작하였다. 그는 또 외부인의 시선과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는 소록도와 과거 흔적을 절대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 한센병(나병) 환자들에게도 예의와 인내와 정성을 다 바쳤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한센병과 평생을 두고 투쟁한 끝에 모지라지고 남은 육신을 유일무이한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한 인간의 생애를 통해 한낱 기호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우리 앞에 감동적으로 펼쳐 보인다.

인간의 존엄을 되살려낸 작가정신!
어린 시절, 작가가 성묘를 다니며 보았던 소록도의 푸른 하늘과 바다빛은 이름 모를 서러움과 한의 빛깔로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삼종 형의 이야기에 스스로의 상상을 덧대어 1995년 이 작품의 초고를 탈고한다. 그러다가 2000년, 국립나병원 방사선과 과장을 통해 이 작품의 실제 주인공인 '심전황' 노인을 만나게 된다. 심 노인은 왕년의 인텔리답게 자서전을 집필해 두었는데, 등장인물과 지명 등이 익명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특히 발병 초기부터 10여 년의 기간은 완전히 탈락되어 있었다. 심 노인에게 자서전의 완성을 권유했던 작가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러한 실패의 과정이 오히려 『유령의 자서전』 특유의 서술 기법을 창안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작가는 한국나협회장 김현수 씨로부터 다른 환자가 쓴 자서전 한 권을 얻어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소록도에서 일어난 비극의 역사와 숨겨진 생활상, 환자들의 은어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 소설의 세목들은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작가는 수없이 '나는 왜 이 소설을 쓰려 하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고, 이러한 자문이 그에게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작품의 주제에 대한 고민을 끝낸 2003년 3차 개작 때, 작가는 직접 소록도 자치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작품 속에 왜곡된 부분이나 환자들에게 누를 끼칠 만한 요소가 없는지 검증을 거쳤고, '영화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 작품의 출간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처럼 철저한 취재와 검증에는, 스스로 '참여문학인'이기를 다짐했던 작가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편견과 폭력에 시달렸던 환자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배어 있다. 작가는 책머리에 이렇게 써두고 있다. "소록도의 하늘빛 바다빛은 너무도 푸르러 외려 나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한센병 환자분들에게 나의 눈물을 담이 이 책을 바친다."

진실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해원의 길
이 소설은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주인공인 김 노인이 걸어왔던 삶의 과정을 드러내는 '자서전' 부분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시점에서 김 노인과 주변의 사람들(화자인 '나'와 출판사 관계자, 김 노인의 가족들)이 자서전 출간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는 현재의 일이다.
자서전 부분에서는 김 노인의 어린 시절부터 발병 과정, 남의 집 부엌에서 밥을 훔치기도 했던 유랑 시절과 소록도에서 겪은 모진 노동과 수모 등의 개인적인 내력과 함께, 1930년대 후반 소록도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 수간호사 사토의 인권유린, 탈출자들의 비참한 죽음, 해방과 동시에 일어난 복수와 관리들에 의한 환자들의 살육 등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자서전 출간 결심을 번복하는 김 노인의 심적 갈등(과거를 기록 발표하여 친자와 상봉하고 선산에 묻히고자
하는 욕망과 가문에 끼칠 누가 걱정되어 출간 결심을 철회하려는 욕망 사이의)과 자서전 속의 익명들을 밝혀내려는 정호(양자)와 그것을 끝까지 막으려는 정산(친자)의 대립이 외적 갈등 구조를 이룬다.

한편, 작품의 화자인 '나'는 김 노인의 자서전 출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심한 귀울림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는 '개인의 이익에 유리하게 역사를 쓰고자 하는 욕망'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자 하는 욕망'이 대립하는 사이에서 고뇌하는 양심의 절규이며, 또한 역사적 비극을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슬퍼하는 울림이다. 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실존적인 자각 의식'이 '통시적인 자각 의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외적·내적 갈등은 그 주체들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됨으로써 타협에 이르는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의 갈등 주체들은 서로 싸우고 투쟁하는 가운데 또 다른 희생양을 잉태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서서히 공동의 목표를 인식하게 되며, 결국 자신을 옭아맸던 비극의 연원에서 헤어나게 되는 길을 찾아내게 된다. 작가는,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과 번민의 원인은 위장된 역사에서 비롯되었기에 진실을 올곧게 직시함으로써만 궁극적인 상생과 화해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직면하기 두려워 배반하고 왜곡했던 '우리 자신의 역사'의 치부를 들춰내고 치유하는 화해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센병
노르웨이 의학자 지그문트 한센이 처음으로 나병의 병원체를 발견하였고, 동시에 이 병이 전염성도 희박하고 유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 그 이름을 따 '한센병'이라 부르게 되었다. 실제로 이 병의 환자들은 멸시나 비하의 어감을 띤 '나환자' '문둥병자'보다는 '한센병자'로 불리기를 바란다.

류영국
1941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35년간 교직에 몸담았고, 오랜 습작기를 거쳤다. 2000년 국제신문 1억원 고료 제1회 국제문학상을 수상한 『만월까지』(전3권, 실천문학사)는 폭넓은 역사탐구, 심원한 정신세계로 구한말 민중의 삶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대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유령의 자서전』은 류영국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미화된 삶 기록 불 태운 뒤 꽃피우고 싶다"

불가항력과 맞붙어 싸우는 인간의 모습은 오랫동안 문학의 소재로 복무해 왔다. 신화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불가항력은 신의 분노, 자연 재해, 혹은 불치병의 형태로 인간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시한부(時限附)라는 점에서 극적이었고 문학적이었다. 그러나 특정 개인에게 얹힌 한센병(나병)은 시한(時限)을 갖지 않고 사실상 평생을 동행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음 이후 후대까지 검은 그늘을 드리운다는 점에서 일상적 비극을 넘어선 인간 조건의 경계를 건드리고 있다.

이 소설은 1910년에 태어나 한센병을 앓다가 여든세 살로 비운에 찬 인생을 마친 한 한국인 남자에 관한 얘기다. 실제 모델이 있으나 작가는 지리적 공간을 옮겨서 약간의 허구를 입혔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윤사중은 전북 지방에서 태어나 이리농림학교에 다녔으나 결혼 후 첫 아들을 낳고 한센병이 발병한다.

유복한 집안의 삼대 독자였지만, 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급전직하한다. 집안 사람들은 그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인물로 꾸민 다음, 집안 내력에 한센병 환자가 있다는 사실을 지워내려 한다. 그래야 집안을 살리고, 손자로 이어지는 대물림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넓은 의미에서 "이것이 우리 현대사다"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 갈라지고 짓눌린 내력을 미화(美化)해서 피륙을 짠 공식 역사의 이면에는 엄연한 실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 실체를 들춰내는 일은 또 다른 갈등과 직결돼 있다.

작가 류영국은 4일 "불태워 버리고 싶은 우리 현대사를 쓰면서도 예술적 문체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면서 "이 소설의 실제 모델은 작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한센병 환자였다는 사실을 묻어두고 사는 주인공, 아버지를 부인하고 사는 그의 아들, 그에게 입양돼 살아온 또 다른 아들까지 모두 '유령'으로 살아온 것이다. 미화된 거짓 역사는 사실 유령의 역사다. 저자는 4일 "유령의 가면을 벗기고, 그 실체를 드러낸 다음, 그것들을 다시 모두 불태운 후 잿더미 위에 새 꽃이 피어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집안 살리려 亡者로 한평생

이 소설은 개인적인 천형과 일제 통치, 6·25 같은 민족적 비극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이의를 제기한다. 한센병 환우들의 세계는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일종의 무풍지대였다. 작은 처참은 큰 처참의 밖에서 맴돈다. 인간 조건의 저편에 터를 잡은 그들에게 역사는 겉치레 영향력의 망토를 직접 드리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소록도에서의 삶, 녹동항을 들며 나며 전국을 유리걸식하는 환우들의 삶, 집안에서 골방에 격리된 채 유령처럼 살아가는 삶, 동네에서 몇 리 떨어진 움막에서의 삶, 그리고 문드러진 콧등을 한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사랑을 나누고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거나 목숨까지 거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현실적인 폭력은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그것을 규율하고 있는 제도나 윤리의 울타리마저 아무 거리낌없이 넘나들고 있었지만….

이 소설은 야금박지고 차지게 달라붙는 북도 사투리가 낭창낭창한 문장 내재율과도 무관치 않다. 2000년 장편 '만월까지'로 1억원 고료 국제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류영국·柳泳國·62)의 근력이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사랑했던 독자들께 또 다른 인간조건을 파들어간 이 소설을 충심으로 권해 드린다.
___조선일보 Books 김광일 기자 (2003년 7월 7일 월요일)


너무나 생생한 나환자의 삶 류영국소설 '유령의 자서전'

소설가 류영국(62)씨의 신작 장편소설 '유령의 자서전'(실천문학사)이 최근 출간됐다. 한센병 환자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로, 역시 같은 소재를 다룬 이청준씨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과 대비하며 읽는 재미를 준다.

'당신들의 천국'이 소록도 낙원 건설사업이라는 '꿈'에 집착하는 병원장 조백헌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되는 반면 '유령의 자서전'은 실제 나환자였던 한 노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당신들의 천국'이 다스리는 자의 일방적인 사랑과 다스림을 받는 자의 자유 간 갈등구조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면, '유령의 자서전'은 제목 그대로 한 유령(나환자)의 인생 고백서다. 전자가 유토피아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파헤치는 '관념적인' 소설이라면 후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이후 한국사회에서 나환자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적인' 소설이다.

소설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나환자인 김민주 노인의 삶의 과정을 드러내는 '자서전' 부분이고, 또 하나는 작중 화자인 '나'가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이다. 작가인 '나'는 나환자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소록도를 찾는다. 자료조사 과정에서 과거 나환자였던 김 노인을 만나게 되고, 노인이 써놓은 자서전을 읽게 된다.

김 노인은 자서전을 모두 내놓지 않고 일부만을 전달하면서 공개 여부를 계속 망설인다. '나' 역시 자서전에 대한 윤색 과정에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자 하는 욕망'과 '개인의 이익에 유리하게 기록(역사)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나환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소설 속 김 노인이 맞닥뜨리는 삶의 장벽들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충격적이다. 이처럼 사실적인 기법으로 나환자의 삶을 다룬 소설은 유례없는 것으로, 현장문학으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전북 완주 출신의 류영국씨는 지난 2000년 장편소설 '만월까지(전3권)'로 '제1회 국제문학상(1억원 고료)'을 수상하며 뒤늦게 문단에 나온 작가다.
___문화일보 김영번 기자 (2003년 7월 7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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