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실천문학신인상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 차분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정서적 환기력을 지닌 서술문, 생동감과 재치가 넘치는 일상적 대화, 농촌에 불어닥치는 변화양상을 치밀하게 따라가면서도 시종일관 서술의 객관성을 잃지 않는 유려함으로 주목을 끌었던 이 소설은, 김유정, 이문구의 계보를 잇는 농촌소설의 모범으로서, 우리 문단에 또 다른 걸출한 신인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하루 동안의, 그러나 하루 이상의 이야기
다수의 평론가들이 '준비된' 신인으로 주목했듯, 한만수는 10여 년이 넘는 습작기를 거쳐 이미 여러 권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소설에서 그는 이문구를 연상시키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 문체를 한껏 뽐내는 충청도 사투리의 입담으로 경험의 힘이 아니라면 결코 포착해낼 수 없는 농촌 풍속도의 경제적 관계와 변화양상을 날카롭게 그려냄으로써 2000년대 농촌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하고 있다. 자린고비 농사꾼 오병수 씨의 하루를 통해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왜곡되고 아픈 삶의 애환과 그 근본에 도사린 우리 사회의 허점까지도 차분히,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필력으로 꼼꼼히 되짚어낸다.
소설의 각 장은 [오전 일곱시 십분]에서부터 [밤 열한시 오십오분]까지 오병수가 맞닥뜨리는 예기치 않은 사건의 발생과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진행된다. 한데 이 하루 동안의 사건들은 어느 특정한 하루에만 일어나고 소멸되는 사건이 아닌, 그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며, 그런 점에서 이 '하루'의 사건들은 농촌의 과거, 현재, 미래를 확인시켜주는 사건, 곧 하루의 시간을 넘어서는 사건으로서 농촌의 삶의 시간적 압축이라 할 수 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농사꾼 오병수의 시선에는 더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만큼 철저히 몰락해가는 농촌의 다양한 모습들이 남김없이 포착된다.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 모습의 일부를 들춰본다면, 은행빚은 물론이거니와 정부 보조금 역시 부담스러운 가계부채가 되어 농민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상황,
"오늘 당장 읍내 축협에 삼백만 원 갚을 돈은 어디서 나오는디? 그 돈은 대추 털듯 작대기만 휘두르믄 대추낭구에서 우수수 떨어지남? 아니믄 둠벙 푸믄 솔솔 기어나오는 미꾸리맨치로 방구들만 두들기고 앉아 있으믄 구들장 밑에서 솟아올라오능겨?"
"돈 읎고 빽 읎는 촌 무지렁이들이 정부 돈 빌려서 농사지은 죄밖에 읎슈. 이왕 터진 입에 한 말씀 드리겄는디, 정부에서 돈 꽁짜로 준대유? 그것도 다 이잣돈이유. 제때 못 내믄 연체이자 물어야 하는 조합 돈하고 개찐도찐이고, 응딩이나 방딩이나 다 그게 그거란 말여유."
농사를 천직으로 알던 농촌여인들이 말 몇마디 잘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보험일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거나 집을 나가버리는 등의 모습,
"입 안에서 쉰내가 나도록 일을 해야만 돈이 생긴다는 것밖에 모르는 농사꾼의 마누라들여. 그런 여자들이 말 몇 마디만 잘하믄 거저 돈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집구석이 눈에 보이고 새끼들이 눈에 보이겄는감?"
등을 일례로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서술된 사건들은 모두 개별화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같이 농촌의 붕괴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거나 침울하지 않으며, 속도감 넘치는 빠른 전개와 충청도 사투리 특유의 능청스런 의뭉함이 넘쳐나는 분위기 속으로 독자들을 흡입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가벼운 문학적 기교에 기대어서는 절대 그려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농촌의 세세한 실상을 모르고서는 쓸 수 없는 영역이며, 곧 몸과 삶을 전부 던져 문학에 투영하고 있는 작가의 문학적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농촌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과거 이문구가 농촌의 쓸쓸한 몰락을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농촌을 도시와는 다른 공동체적 유대관계로 움직이는 휴머니즘의 공간으로 그려냈다면, 한만수는 농촌이 몰락의 길이 아니라 파멸의 한가운데에 들어와버렸다는 더 아픈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오늘의 농촌에서의 실제 삶을 비통에 가득찬 눈으로 읽어내고, 비록 그 매개는 말맛 그득한 사투리와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일지언정 소름끼치도록 냉혹하게 그것들을 풀어낸다.
작가는 경제적 파산과 가족 붕괴, 인간적 윤리의 실종, 생존의 궁핍 등으로 신음하거나 절망하는 인간들 아니면 아예 삶을 포기해버린 농촌의 인간들을 우리의 눈앞에 들이민다. 그러한 그의 시선은 경제적 파탄과 좌절로 내몰린 농촌의 위기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들, 도박과 성(性)에 강박된 농민들의 복잡한 심리에 정확하게 닿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인생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 가득한 시선을 통해, 한만수식 입담과 다양한 인물군들의 다채로운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것을 소박하게 터득한 사람들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조우를 하게 된다.
한만수
1955년 충북 영동 학산에서 태어났으며, 17년 동안 은행과 보험회사에서 근무했다. 1990년 월간 『한국시』에 시 「억새풀」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1991년부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시집 『너』, 장편소설 『겨울 코스모스』, 『탕』, 『그들만의 사랑』 등을 출간하였으며, 새로운 시선으로 창작에 전념하고자 입학한 경희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2004년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였다.
우리시대 농촌현실 해부…실천문학 신인상 한만수씨 ‘하루’ ―― 정철훈 기자, 국민일보(2004. 01. 25.)
우리시대 농촌현실 해부…실천문학 신인상 한만수씨 ‘하루'
“오늘 당장 읍내 축협에 삼백만 원 갚을 돈은 어디서 나오는디? 그 돈은 대추 털듯 작대기만 휘두르믄 대추낭구에서 우수수 떨어지남? 아니면 둠벙 푸믄 솔솔 기어나오는 미꾸리맨치로 방구들만 두들기고 앉아 있으면 구들장 밑에서 솟아올라오능겨?”
제9회 실천문학 신인상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인 한만수(49)씨의 ‘하루’가 출간됐다. 작고한 이문구를 연상시키듯 농도 짙은 충청도 사투리의 입담을 통해 자린고비 농사꾼 오병수씨의 24시를 그려낸 ‘하루’는 그 영역이 점점 좁아지고 농촌소설의 전통을 이어가는 디딤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오전 7시10분부터 밤 11시55분까지 오씨가 맞닥뜨린 예치기 않는 사건을 통해 오늘의 우리 농촌이 직면한 왜곡되고 뒤틀린 현실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오씨는 신새벽에 일어나 포도밭에 거름을 경운기로 실어다놓고 들어와 아내 길자와 언쟁을 벌인다. 축협에서 대출받은 한우입식자금 300만원 갚을 길이 막막해 심사가 꼬여있던 탓이다.
“아침부터 쓰잘디읍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어서 돈이나 내놔.” “얼매나 줘유?” “짬뽕 곱배기 삼천원에,쐬주 한병 삼천 원,차비가 천 원씩잉께 왕복으로 이천 원 혀서 딱 만 원만 있으면 될 끼구먼.”
작가는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통한 현실을 말맛 그득한 사투리와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으로 잡아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현장 고발은 경제적 파탄,가족 붕괴,인간적 윤리의 실종으로 더욱 초라해지고 있는 농민들의 심리를 냉혹하리만큼 정확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특히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대출금과 연체 이자의 그물망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의 삶을 농촌 경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헤친 대목이 빛난다. 17년동안 은행과 보험회사에서 근무한 한씨의 경험이 소설속에 그대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 월간 ‘한국시’로 등단한 한씨는 그동안 장편 ‘겨울 코스모스’ ‘탕’ ‘그들만의 사랑’ 등을 출간했으며 올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집념의 만학도이기도 하다.
--국민일보 정철훈기자 chjung@kmib.co.kr
'실천의 문학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이복형제들 (2004) (0) | 2013.08.06 |
---|---|
그 매듭은 누가 풀까 (2003) (0) | 2013.08.06 |
오랑캐꽃 (2003) (0) | 2013.08.06 |
살아남은 전설(전 2권) (2003) (0) | 2013.08.06 |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 (2003) (0) | 2013.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