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 벼린 칼,
『단검』
지상의 삶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날카로운 부정의식을 엔진으로 삼은 이 시집은 우선 ‘지금, 여기’가
아닌 저 먼 곳을 향해 열려 있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는 당나귀는/며칠을 걸어야 우주에 당도하는가/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우주로 가는 당나귀」 부분 )는 바람으로 시인은 유랑의 길에 나선다. 시인이 흠모하는 랭보와 보들레르, 바쇼,
정약전, 등반가 고상돈 등은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켜 자유를 지향한 유랑의 지표다.
해설을 쓴 평론가 이혜원은 유랑의식의
기저에 깔린 심리를 “진정한 고향이나 집은 이제 존재하지 않고, 현실적 공간은 진실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방랑은 필연적이다. 낭만주의자들의
무정부적인 성향은 그들의 방랑이 추구하는 자유의 정신과 상통한다”고 분석한다.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하는 그 자유의 정신이 바로
‘단검’이다. 시집『단검』은 “한순간/모든 빛과 어둠을 뚫고 그대와 연락되기를”(「택리지」)
바라는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다.
8월 염천, 서울역 광장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잠자던 한
할머니가 문득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길게 빨더니 여기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 어디냐 묻는다. 남대문 방향을 가리키며 남대문시장이라 말했더니 가장
큰 시장은 어디냐 물었다. 아침 햇살이 얼굴에 쏟아져 몹시 더웠다. 남대문시장이 가장 크다고 일러주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수원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수원시가 아니라 수원부와 같은 조선 후기의 지명으로 받아들였다. 무엇을 사려고 그러냐 물었더니 무엇을 팔려고 한다고 하였다.
신문지로 둘둘 말아 보자기에 싼 뭉치가 하나 옆에 놓여 있었다. 뭔데요. 몰라도 된다고 대답할 때는 마치 함흥 사투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
동대문 벼룩시장 같은 난전에 물건을 펼치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럴 물건이 아니라고 화를 냈다. 뭐냐고 다시 물으니 할머니는 일어서며 말했다.
칼이다 이눔아. 서울역에서 지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남대문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잠자던 한 자루 단검이 꼿꼿하게 한성역 광장을
건너는 중이었다.
_「단검」 전문
‘한순간’으로 명명된 서정적 시간대에 닿기 위해서 시인은 ‘단검’을 벼린다. 이
시간대는 일상적 인식으로는 닿을 수 없는, 모든 경계성이 허물어지는 시간대이다. 수원시가 수원부가 되고, 서울역이 한성역으로 치환되는 상상력을
통해 노숙자 할머니는 한 자루의 ‘꼿꼿한’ 단검으로 거듭난다. 단칼에 일상의 영역을 베어버린 뒤 ‘그곳’에 닿고 싶은 초월의지를 상징하는
‘단검’이 기실은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자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곳’을 지향하면서도 ‘지금,
여기’의 삶에 끝없이 밀착하고자 하는 시인의 다감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일테면, 결연한 의지로 무장한 ‘단검’은 지상의 삶에 대한 연민으로
흘린 시인의 눈물에 벼린 칼날이었던 것이다.
“나는 평생 영원이라는 집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언제나 지상의 삶을 그리워할 것이다”(「탈출」)라는 고백이 이 시집을 응축한 구절이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미지를
낳는다.
―전갈은 전 생애를 싸우며 살지요.
하늘도 그를 기억하여 별자리를
만들지요.
아아, 나도 전갈이군요.
몸의 상처, 하여 죽음으로
제 별자리를 만드는 일
나의 여행은 극단에서 노래 부르는
일
그 끝자리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일
_「여행」 부분
전갈에겐 독이 있다. 시집『단검』에도 세계와
대결하는 맹독성의 결기가 보인다. 우대식은 극단을 향해 자신을 몰고 간 뒤에 얻어낸 독으로 전 생애를 다해 싸우는 시인이다. 빛나는 별자리에
닿기 위해 지상의 상처를 기꺼이 감내하는 싸움이 그의 노래다. ‘죽음으로 제 별자리를 만드는’ 그 아름다운 독에 누군들 감염되고 싶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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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산문집『죽은 시인들의 사회』가 있다. |
차례
제1부 삵
詩人 ― 11
삵 ― 12
진달래
장의사 ― 14
단검 ― 16
검수(劍樹) ― 17
숨에 관한 보고 친절한 神 ― 18
우주로 가는 당나귀 ―
20
택리지 겨울 남행 ― 22
고래와 시인 ― 24
권총 ― 25
로드킬 ― 26
혁명을 추억함 ― 28
시론
혼자 꿈꾸는 혁명 ― 30
육박 ― 32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 34
해변의 교회 ― 35
제2부 꿈은
멀었다
근황 ― 39
꿈은 멀었다 ― 40
멕시코 만에서의 전생 소금인형 ― 42
청춘 랭보를 추억함 ―
44
살쾡이의 눈 마쓰오 바쇼를 추억함 ― 46
백 년 동안 술을 마시다 ― 48
7월의 꿈 ― 50
싱싱싱 ―
52
여행 ― 54
가을 햇살 아래 ― 56
구나행(驅儺行) ― 57
생각의 구름 ― 58
탈출 ― 59
서른의
마지막 날 ― 60
자화상 ― 61
응시 ― 62
절정 ― 64
제3부 만행
한 오백 년 ― 67
천
마리 나비가 날아올랐다 ― 68
직방(直方)의 그늘에 서다 ― 69
상원(上院)에 서다 ― 70
만행 이대흠에게 ―
72
태백에서 칼국수를 먹다 ― 74
거리의 악사 ― 76
낡고 깨끗한 방 ― 78
동행 ― 80
무릎으로 기다 ―
81
애월, 애원, 겨울비 ― 82
가을이 오면 ― 83
이상한 나라에서 ― 84
열하(熱河)에서 꿈꾸다 ―
86
잠겨간다는 것 ― 88
설국(雪國) ― 90
제4부 겨울 나그네
사라진 역 ― 93
겨울 나그네 ―
94
배웅 ― 96
뻥의 나라에서 ― 98
환화(幻花) ― 99
허공의 절간 ― 100
모자란남움직씨 불완전타동사를
위한 변명 ― 101
예인 ― 102
칼의 노래 ― 104
달나라에서 ― 106
영정 ― 107
기일 ―
108
치마 열두 폭 ― 110
무애(無碍)에 관한 명상 ― 112
물에 젖은 초파일 ― 113
소풍 ― 114
첫눈
― 115
시인 ― 116
해설 | 이혜원 ― 117
시인의 말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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