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눈물은 푸르다』로 2002년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한 최종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과거의 이념지향적인 노동시와 다르게 노동현실을 천착해 나름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원목 같은 순수함과 생명력”의 시인으로 평가받아온 시인이 4년 만에 내놓은 시집 『고양이의 마술』은 “자본주의 문화-예술을 노동과 대비하면서 근본적이고 시적인 비판을 전개”(「해설」)한다. 사물을 ‘객관적 상관물’로 거리를 두는 대신, 몸이 곧 망치, 연장이 되어 “동물처럼 사물을 대”(「보랏빛」)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편들은 ‘노동’의 의미를 계급성과 당파성을 뛰어넘어 보편적 세계관으로 확장시킨다.
허구의 삶에 대항하는 자연과 노동의 사제(司祭)
“나의 시는 예술이기를 포기한다”(「나의 시」). 이 시구는 최종천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이자 그의 시관(詩觀)을 엿볼 수 있는 문학적 테제라 할 수 있다. “예술이란/자연을 고장 내놓은 것들”에 불과하니 ‘나의 시’만큼은 그 일에 복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적 발언! 문화 생산자이기도 한 시인의 이 같은 말은 언뜻 모순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노동자 시인 최종천만의 살아 숨 쉬는 날것의 삶과 목소리가 담겨 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연탄가스 사고로 학업을 중단,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든 그는 구두닦이, 맥줏집 종업원, 중국집 배달원 등을 전전하다 스무 살 무렵에 용접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임노동자로 생활하는 시인은 노동한 날수를 꼼꼼히 수첩에 기록하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독서와 시쓰기를 병행하고 있다(「작가수첩」). 하여 그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서정과 탐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노동의 참의미와 인간을 탐구하는, 이른바 사유시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사람의 새끼를 보면 한숨만 터지는데/고양이의 새끼를 보면 은근히 후회되는 것이다./사람인 나는 못하는, 시집가고 장가가고/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고양이의 마술이다.) _「고양이의 마술」 부분
이번 시집에서는 특별히 두 세계의 대립이 도드라지는데, 자연성이 파괴된 자본주의에서의 문화(예술)로 일컬어지는 허구의 세계와 무너진 자연성의 회복 욕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표제작 「고양이의 마술」에서는 이 두 세계 간의 요원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고양이를 통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 다시 되살리기란 ‘마술’이 현실이 되는 것만큼 힘든 일임을 일깨우며 이 둘 사이에 ‘노동’을 위치시킨다. 각박한 삶을 견뎌야 하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아닌, 무너진 자연의 원시성을 회복하는 사제(司祭)로서의 ‘노동’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세계의 최초 에너지 생산자”인 “노동계급”의 힘을 빌려(「노동은 인간의 光合成이다」) 서로 닿기 힘든 두 세계의 간극을 좁히고자 한다.
예술에 의한 문화는 그것이/인간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며/먹이사슬에서 인간 위에 있다는 것/따라서 인간을 먹이로 한다는 사실! _「나의 시」 부분
시인은 먼저 자본주의 산물로서의 ‘문화-예술’을 하나의 허상으로 본다. 인간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 향유’ 차원을 넘어 오히려 그것에 얽매여 우리 자신을 소모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한다. 그래서 인간을 더욱 소비 지향적으로 만들고,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을 굴종시키는 자본주의의 문화-예술을 경계한다. 그렇게 ‘문화’라는 이름에 가려진 폭력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이 시인에게는 ‘허구의 세계’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제의 진정한 의무는 우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끊임없이 벗겨내는 데 있는 것이다. _「성(性) 앞에 평등하라」 부분
바로 이 ‘허구’를 벗겨내는 것이 노동이요,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곧 노동계급이다(「소비자가 왕이다」). 시인은 이들을 가리켜 이데올로기와 문명의 허구를 벗기는 사제로 호칭한다(「허물벗기」).
4부로 구성한 총 60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입안에 쇳밥이 서걱거리는 느낌, 다닥다닥 용접똥(스파타)이 튄 우툴두툴한 철제 표면을 혀로 핥는 ‘광물성’이 느껴진다(「달변의 혀」). 그의 시들은 “현란하고 애매한 수사의 과용이나 한편으로 억지 서정을 이끌어내는 현 한국시”(「해설」)와는 달리 투박하고 직설적이며 선언적인 언사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는 최종천 시의 질박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는 우리가 참의미의 ‘노동’으로써 삶을 일궈갈 때 그동안 울지 않았던 우리의 가슴에 노래가 흐르고(「가슴」), 가슴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보랏빛 무늬(「보랏빛」)”가 깃든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추천의 글
‘진짜’ ‘노동자’ ‘시인’ 최종천의 『고양이의 마술』, “단언하건대 예술이란/자연을 고장 내놓은 것들이다./나의 시는 예술이기를 포기한다”(「나의 시」)는 폭탄선언 와중, “아 ! 내가 은밀히 조금은/심각하게 고독하구나! 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지는”(「보랏빛」) 시간과 “언젠가 을지로 지하상가에서/몽당연필에 침을 묻혀가며/까맣게 성서의 한 줄 한 줄을 지우는/(중략)/그 진한 지린내로 성서를/다시 쓰고 있었던”(「붉은 피톨」)을 병치하고, “주먹과 망치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주먹을 쥐었을 때만/망치를 쥘 수 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망치는 나의 연장, 내 몸이다”를 “예술로는 자연을 볼 수가 없다”로 은근짜 퇴짜 놓다가 “자루에 머리를 달아 손에 들려진 망치는/명사에 동사가 달린 언어와 같다.”(「망치에게」)는 일순 도약으로 마감하고, “나의 말은 누구의 상처를 핥지도 않고 되돌아와 나의 무릎에서 부서진다 그것이 詩다 시, 너 누구야?”(「詩, 너 누구야?」) 하는 통렬한 자기반성과 “곡선의 애무를 받고 싶을 땐/욕조의 물속으로 들어가”(「그리운 곡선」)는 일상의 에로티시즘, 그리고 “매장되기 직전의 死者의 눈망울이 포착한 하나의 풍경을 위해 우리들의 세계는 존재한다”(「文書 A」)는 가장 첨예한 탈계급적 비관과 “다리가 불구가 되면 걸음이 춤이 된다니!”(「춤을 위하여」) 하는 찬탄을 겹치고 상호 관통시키더니 “키도 없는 벌레의/긴 그림자/(중략)/그녀가 얼굴을 들면/모든 빛의 호수는 滿潮가 된다/한 가지 예를 들자면/과일이 익어간다”(「미인」)는 인간보다 더 우월한 벌레의 경건에 달하는 ‘진짜적’, ‘노동자적’, ‘시적’ 명민함이라니, 이 『고양이의 마술』은, 나도 단언하건대, 오로지 최종천만의 것이다. _김정환( 시인)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하여 등단했다.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등이 있다.
[제1부] 보랏빛 | 먼지 알갱이 | 고양이의 마술 | 붉은 피톨 | 달변의 혀를! | 망치에게 | 망치질하기 | 시는 그렇게 죽어라 | 오늘 거멍이가 죽었다 | 소설, 혹은 real | 어떻게 다를까? | 密度 | 시, 너 누구야? | 悲哀 | 파업 보름째 [제2부] 오라! 거짓 사랑아, | 요리사의 책상 | 그리운 곡선 | 나는 몰랐어라 | 허물벗기 | 점심시간 | 文書 A | 볼트를 심다 | 아기가 울다 | 공병 | 나, 숨을 곳 | 窓 | 미남은 강하다 | 춤을 위하여 | 기저귀 [제3부] 미인 | 성(性) 앞에 평등하라 | 가슴 | 소비자가 왕이다 | 도마뱀의 꼬리 | 이데올로기 槪論 | 일 죽이기 | 딱! 절반 | 진정한 司祭 | 용접의 시 | 還生하소서 | 개미에게 | 춘곤증 | 틈새 | 착한 벌레 [제4부] 오천 원 | 나의 시 | 당신 | 굴뚝은 높다 | 피로 | 성공하고 싶으세요? | 母系社會 | 작가수첩 | 떡에 관하여 | 네발 달린 짐승이 되어 | 슬픈 운명의 노래 | 오래된 미래 2 | 노동은 인간의 光合成이다 | 데카르트의 迷宮 | 我 해설 - 이성혁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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