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시평』으로 등단한 전성호 시인이 첫 시집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이후 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스스로 ‘실존적 여행시 쓰기’를 표방하며 세계 곳곳을 떠돌던 그가 미얀마에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올해로 십 년. 60년 이상 군부가 통치하는 정치 상황 속, 133개 이상의 부족이 다민족국가를 이루고 사는 그곳에서 시인은 자발적으로 그곳의 새로운 한 부족이 된 듯싶다. 이번 시집은 “부산 민락동의 횟집”이나 “미얀마의 바간 혹은 만달레이에서 만나는 삶들”을 본원적 층위에서 통합하려는 노력과 함께,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의 서정이 짙게 배어 있다.
이국에서 모어(母語)로 쓴 노마드 엘레지
시인은 나고 자란 모국을 떠나 “양곤 강남 쪽에 제비집”(「제비집」)을 짓고, “두 시간 반의 시차”(「눈 내리는 미얀마」)를 가불하며 꾸려가는 노마드적인 삶을 시편들에 담았다. 그에게 ‘떠남’은 자기 부정의 행위가 아닌,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지난날의 “긴 그림자를 불러내는 일”(「시인의 말」)이기에 떠나온 곳의 시간과 자리를 더 웅숭깊게 만든다.
시인이 불러내는 그림자들은 시집 곳곳에서 ‘물’ 이미지와 함께 흘러온다. “저녁 광채를 끌고 죽음보다 깊은 곳으로 흘러드는” 폭포(「아니스칸 힐 우소민의 집」), “눈물처럼 흘러가는 흘라잉 강과 빤라잉 강”(「양곤 엘레지」), “뿌리 없는 바다”(「강 따라 바다로」), “두 시간 반 전의 눈”(「눈 내리는 미얀마」), “쉼 없이 내리는 내 안의 빗줄기”(「雨」)…… 형태는 제각각이어도 하나의 수원(水原)에서 발원한 그들은, 같은 ‘유년의 경험’을 품고 시집 중심부를 흐른다. 애초 유목민들이 대지의 물을 따라 삶의 궤적을 그려갔던 것처럼 대지의 근원, 즉 모성으로서의 물을 생각한다면 전성호 시인의 ‘물’ 이미지는 근원에 대한 향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시집 전반부에 집중된 미얀마의 강 주변 풍경시들은 표면적으로는 낯선 이국의 향취가 전경화된 듯 보인다. 하지만 정작 시적 화자는 “유배지의 물고기”(「아니스칸 힐 우소민의 집」)처럼 떠나온 곳으로 그 시선이 향해 있다.
시집 후반부로 가면서 그 ‘물’들의 시원이 조금씩 드러난다. 어머니가 여름 한철 때를 밀어주던 “뒷도랑”(「문득, 뒷도랑」), 유년 시절의 거처였던 “산동네/슬레이트 지붕에서 떨어지는/낙숫물”(「시간을 이겨내는 그림자」), “머리 위에/은단같이 맺히는 빗방울”(「穀雨」) 등 미얀마에서의 물이 시공을 거슬러 역류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이자 한 개인의 역사가 시공을 초월해서도 단선되지 않고 이어지는 또 다른 실존에 대한 방증이다. 흘러온 지역에 따라 흘라잉 강과 빤라잉 강으로 나눠 불리지만 결국 같은 라잉 강이듯, 전성호의 시들은 “국가 속에서도 국가 없는 별들이 꾸는 꿈”(「미얀마, 두들기는 소리를 듣는 북」)처럼 경계 없이 유목하기를 원하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의 물줄기에 띄워놓는다.
■ 추천의 글
전성호의 시는 지도의 경계선에 피어 있는 풀잎이다. 풀잎은 바람을 누리면서 경계선을 뒤흔든다. 그는 ‘마른 쇠풀 들꽃대의/흔들림 속에’ 살아 있음으로써 죽음마저 뛰어넘고자 한다. 여기서 잃어버린 시간대를 몸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불가능한 꿈이 여행자의 시선을 통해 돌올하게 드러난다. 여행하는 자는 횡단하면서 동시에 머무는 자이다. 머묾에 일상의 각질이 낄 때 원심력이 작용하고, 방랑이 표면을 스치는 바람에 그칠 때 나를 향해 떨어지는 구심력이 작동한다. 이것이 ‘같은 길을 늘 새롭게 떠도는 구름’의 문법. 구름은 비를 몰고 오고, 연민을 가득 품은 빗방울은 거울 파편처럼 지금 여기와 저기를 동시에 비춘다. 울음을 강줄기로 하여 뜨겁게 달아오른 ‘세상의 대낮을 서쪽으로 끌고 가는 배’, 전성호의 시는 소멸해가는 저물녘의 시간대와 만남으로써 ‘매 순간 거듭 태어나는 드넓은 들판’의 진경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손택수(시인)
잘게 부서져버린 거울에 비추어진 세계가 오히려 익숙한 자의식이 되어버린 획일화된 세계에서 새로운 서정의 힘을 발휘하는 전성호의 언어들은 대부분 미얀마에서 쓰였지만 이렇게 국경 너머의 공간이 모국어의 풍요로운 텃밭으로 환원되고 있어 놀랍기만 하다. ‘산맥을 넘어가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구름’처럼 완강한 일국주의 경험을 넘어 두 개의 혹은 그 이상의 세계로 지평을 확장해가는 전성호의 세계는 또 다른 새로움이다. 이영진(시인)
1951년 경남 양산(서창)에서 태어나 동아대 경영학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을 졸업했다. 2001년 『시평』에 「기관구를 엿보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와 시산문집 『지속되는 사랑, 미얀마』가 있다. 현재 미얀마에서 10년째 살고 있다.
죽음의 높이 | 어둠 앞을 걷다 | 제비집 | 양곤 엘레지 | 흘란따야의 편지 | 개 울음 | 아이 울음 |아니스칸 힐 우소민의 집 | 벽 | 떠자민의 힘 | 바람의 일기 | 어둠과 환함의 중간 정도에서 바라보다 | 말 없는 나의 돼지들은 | 미얀마, 두들기는 소리를 듣는 북 | 강 따라 바다로 | 조랑마차 |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 무풍지대 | 雨 | 눈 내리는 미얀마 | 햇살이 웃는다 | 망고 나무가 있는 집 | 관찰 | 밤하늘의 이방인 | 바고 강 | 가난한 풍경이 말하는 | 마른천둥 | 내가 나에게 묻는 말 | 마지막 선물 | 혼자 있게 하는 별 | 문득, 뒷도랑 | 풀잎 기우뚱한 달밤 | 폐(肺)가 말씀하신다 | 보리수 | 봄비 되어 | Sahara | 재봉공 | 공중변소 | 빛 속의 뼈 | 비 | 나는 안다 | 시간을 이겨내는 그림자 | 빈방 | 성자의 눈을 닮고 싶은 | 장터 사람 | 오일장 | 사진 고르기 | 꾸무장우 사소, 꾸무장우 | 낡은 소파를 보며 | 연꽃 | 다시 서릿바람 | 예레미야 애가 | 문득, 여름 | 백담사 | 곡우(穀雨) | 황사 | 갈대 할아버지 | 인왕 산정 | 반계, 청개구리 | 사막 가운데 내리는 어둠의 뿌리 | 만취 | 음을 벼리는 손 | 새우깡 | 序詩 | 발문 이영진 |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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