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제1회 『창작과비평』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 방민호 교수(서울대학교)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그간 그가 보여준 문학평론가로서의 활발한 이력을 알고 있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겠지만 그가 시인으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것을 알 만한 이들은 알고 있다. 2001년 『현대시』 4월호에 「옥탑방」외 2편의 시가 신인추천작품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나온 방민호는 지난 10여 년간 모던한 시대감각에 바탕하여 운율과 어조를 중시하는 서정적인 시편들을 발표해왔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인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는 그간의 성과물이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순수, 영원, 사랑의 열망을 때로는 ‘연시 풍’으로, 때로는 ‘전위시 풍’이나 ‘명상시 풍’으로 들려준다. 그리하여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본래적인 것들의 환원을 꿈꾸게 만든다”(오세영).
‘고립의 나날, 병든 가슴, 먼 곳을 떠돌아 온 구름’의 노래
눈부신 우울로써 청춘을 기록하다
방민호의 시는 인간이기에 숙명처럼 따라올 수밖에 없는 보편적 ‘부재’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시는 고립의 나날, 가슴이 병들어 있던 시간, 구름처럼 먼 곳을 떠돌던 시간 속에서 솟아”났다는 「시인의 말」에서 짐작되듯 그의 시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한 한 폭의 정물화로 보인다.
“당신은 내 아픈 눈동자 속으로 내 안에 들어와 /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 당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 당신이 가라는 곳으로 가 / 당신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오” _「빙의」 부분
부재 대상과 “빙의”함으로써만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이렇게 고립되고 병든 시간을 견딘 그의 시에서는 일면 모던한 지식인의 초상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 단초가 바로 시적 화자와 베냐민을 동일시한 「나의 베냐민」이다. 베냐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수많은 메모로 19세기 파리를 몽타주화한 것처럼 ‘탑 클라우드’, ‘보보호텔’, ‘MAUM’ 등 길거리에 늘어선 입간판들은 시적 현실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는 부유물들의 형상을 몽타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반지하방’, ‘겨울 동물원’, ‘옥탑방’, ‘수족관’ 등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게 존재하는 사물의 공간에 포섭된 시적 화자의 모습에서 ‘부재’를 느끼는 상실자의 포즈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박하지 못하는 내 혼은 환영 같은 탑 클라우드를 타고 흔들리면서 흘러가면서 얇고 가느다란 여인의 향기로운 수풀 속으로 스며드는 꿈을 꾼다” _「탑 클라우드」 부분
평론가 홍용희는 이 시집을 “이별의 하염없는 상실감” 또는 “사랑의 에테르”로 발효시킨 포자로 감지하며, 그렇기 때문에 “환상적이지만 현실이고, 부도덕하지만 순수하고, 외설적이지만 천박하지 않고, 감상적이지만 진정성으로 가득”하다고 평한다.
65편의 시를 담은 이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장난 그리운 아이 눈빛으로’에는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 시편을 모아놓았다. 제2부 ‘흔들리면서 흘러가면서’에는 영화나 여행지 등에서 받은 영감에서 비롯된 시편들이다. 제3부 ‘오늘처럼 세상이 반짝이는 날엔’의 시편들은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 시인의 예민하고 여린 자의식이 엿보이는 시들을 모아놓았다. 제4부 ‘나도 저 타인들처럼’은 ‘사회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라크전과 용산참사, 자본주의의 그늘에 가린 빈곤층의 삶 등에 시인의 시선이 가닿아 있다.
“예술이 손끝의 기교와 요란한 수식어에 묻히고 포스트모던도 낡아가는 지금”(최영미), 우리는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를 통해 오랜만에 “서정과 철학을 접목한”(오세영) 담백한 시를 만나는 뜻밖의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추천의 글
산다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일까. 있다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 ‘나’라는 것이 과연 나일까. 때로는 연시 풍으로, 때로는 전위시 풍으로, 때로는 명상시 풍으로 시인이 이 시집에서 치열하게 묻고 있는 것은 ‘부재(不在)의 삶’이라는 명제이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 역설적 인식은 당연히 잃어버린 어떤 본래적인 것들의 환원을 꿈꾸게 만든다. 영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순수라고도 할 수 있고 자유 혹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시에서 서정과 철학을 접목한 우리 시대의 한 개성 있는 젊은 시인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_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예술이 손끝의 기교와 요란한 수식어에 묻히고 포스트모던도 낡아가는 지금, 어두운 반지하방을 홀로 지키던 고양이의 눈빛을 말하는 시인이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며, 나는 한국 남자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릴 적 헤어진 강아지를 그리워하다, 어느덧 밤이 무섭지 않은 동물이 되어 사랑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느릿느릿 휘젓다가 문득 급소를 찌른다. 이건 장난이 아니거든. 사랑이거든. 나는 네 슬픔을 술에 타서 마신다는 베냐민을 닮은 사내가 선언하는 차디찬 진실에 나는 매혹되었다.
정교한 마음의 조각들을 모아 방민호가 처음 펴낸 이 시집은 구로공단과 서교동의 피캇거리, 33층의 종로타워를 오가며 문밖에서 살았던 어느 청춘의 기록이자, 개인을 초월한 시대의 일기로 읽힌다. 규격에 맞는 논문을 쓰느라 걸친 껍질을 벗고 그가 보여준 눈부신 우울에 감연된 나는, 다시 살고 싶었다. _최영미(시인)
방민호_충청남도 예산 출생으로 공주와 대전에서 성장했다. 일찍부터 시를 쓰겠다고 생각했으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면서는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대학원 재학 중에 계간 『창작과비평』에 최인훈, 이청준, 이문열의 소설을 분석한 평론 「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논리」를 발표하면서 등단,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으로는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합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행인의 독법』,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등이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 중에 본적격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01년 4월에 「옥탑방」, 「사랑의 흔적」, 「시간을 거꾸로」 등의 세 편의 시가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시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모던한 시대감각을 바탕으로 운율과 어조를 중시하는 서정적인 시를 써왔으며 이번에 펴내는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는 시 등단 십 년 만의 첫 시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일제강점기의 포스트콜로니얼한 문학현상들에 대한 연구, 작가 손창섭에 대한 연구 등에 주력하고 있다.
제1부 장난 그리운 아이 눈빛으로 행복 | 괭이 | 벚꽃 지다 | 사랑 | 너 떠난 후 | 겨울 동물원 회상 | 빙의 | 스토킹 | 도미노 게임 | 달 | 그때 | 한 떨기 꽃 | 파도 | 진달래꽃 | 어젯밤 꿈에 저는 창부가 되어 | 나의 수심가 | 사랑의 흔적 | 눈동자
제2부 흔들리면서 흘러가면서 호타루이카 | 탑 클라우드 | 보보호텔 | MAUM | 가네코 후미코 | 눈물주 | 소월의 <부모> | <화려한 휴가> 보네 | 나의 베냐민 | 나의 스피노자 | 통영 가까운 바다 | 진도에서 하루 | 장난감 낙타 | 울진 생각 | 시안 바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제3부 오늘처럼 세상이 반짝이는 날엔 낭비는 나의 인생 | 스윙 | 봄날 | 서든데스 | 괭이 2 | 괭이 3 | 나도 내가 | 한 사내 강 건너가네 | 나 사는 곳 | 마음 다치고 나니 | 상처 | 옛날 | 기체 여행 | 문밖에서 살아야 할 | 강가에 선 나무가 되어
제4부 나도 저 타인들처럼 죽음의 나날 | 불 | 코모도처럼 | 소리 | 말 | 괭이 4 | 봄이 와도 | 새벽에 담을 앓다 | 갑각류의 봄 | 어떤 가입신청서 | 우리들의 반창회 | 아빠 | 옥탑방 | 이것은 | 시간을 거꾸로 | 선악에 관하여
발문 - 최동호 / 해설 - 홍용희 / 시인의 말
쉬워 보이지만 음미할수록 깊은 시가 좋은 시 아닌가 ――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2010. 12. 13.)
논리적 평론 아래 감춰진 ‘감성’이 빛을 보다 ――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2010. 12. 12.)
순수를 좇는 평론가의 첫 시집 ―― 김지영 기자, 동아일보(2010. 12. 11.)
"희망없던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건 詩" ―― 정아영 기자, 매일경제(2010. 12. 6.)
"희망없던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건 詩" ―― 문혜정 기자, 한국경제(2010.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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