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한 배영옥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배영옥은 등단 당시 “유행과 상투성을 독창과 참신으로 가장한 것 일색인 문학 현실에서 문학의 생명력이 일상 속 상식적 사고와의 싸움”임을 실현할 만한 가능성 있는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이번 시집은 “언어가 말하지 못한 모종의 부재들, 가령 틈, 간극, 허공, 자취” 등의 이미지들을 통해 “익숙한 언어들이 낯선 의미와 정서로 발산되는 서늘한 풍경”을 연출한다.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지의 타자”를 향해 그녀만의 지고한 시적 성취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해설」).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
그 사유에 바쳐지는 불협화의 언어들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는 늘 ‘간격’이 존재한다. 배영옥의 시어들은 이 간격을 생성하면서 그 지점에서 시를 태동시킨다. 해설을 쓴 권채린은 배영옥 시편들의 기저음이 바로 간격을 야기하는 ‘불협화’에 있음을 읽어낸다. 물속과 물 밖(「그림자」), 삶과 죽음(「언제나 지척에 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기댄 등과 등(「유리벽의 독서」)처럼 간격을 만들어가는 시작(詩作)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상반된 결핍을 서로 욕망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현상계를 보여주거나, 시인의 기억 속에 불협화로 존재하는 것들을 들춰낸다.
물속의 왜가리가 / 물 밖의 왜가리를 올려다본다 //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마주칠 때 // 머릿속에 들끓는 / 간절함이여 // (중략) //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몸 밖의 그리움이여 _「그림자」 부분
불협화로 인한 ‘간격’이 분열증적인 자아, 혹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라면 배영옥의 시에서 나타나는 간격의 출처는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자신의 유년 시절의 굴절된 기억을 모티프로 한 시편에서, 후자는 미지의 타인을 “너”로 호명하는 시편들에서 주로 등장한다.
“그 어떤 답례나 화답” 없는 “늘 매캐한 기름 냄새”(「바퀴는 무럭무럭 자란다」)뿐인 시적 화자의 유년에 대한 기억. 자신의 과거와 부정합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어찌 시인뿐이겠느냐만 배영옥의 경우 “어머니는 /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 식은 아랫목은 다신 데워지지 않았다”(「만월」)라든가, “거대한 바퀴가 끌고 가는 / 그 끝없는 갈증이 / 어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바퀴는 무럭무럭 자란다」)에서처럼 그 불협화의 연원이 “불모와 유폐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유년 시절과 고향에 대한 시편에서 발견된다.
지나고 보면 / 모든 순간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 사실 아주 멀리 유배되어 있던 것 // (중략) // 너는 깜빡깜빡 /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몸 바꾸는 중이었을까 _「순간의 유배」 부분
배영옥 시에서 자주 감지되는 ‘죽음’의 이미지는 자신의 성장을 돕는 동력이자, “소멸이 아니라 존재가 변환하는 ‘순간’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에 ‘너’로 호명되는 타자 역시 시적 화자 자신일지 모른다. 따라서 살면서 지척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인식하는 시인에게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해설」). 선험적으로 내장된 것이든,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간격이든지 간에 태생적이라 할 만한 시적 화자의 이러한 습속은 두 세계 간의 상충이기보다 세계와 공존하려는 하나의 양식으로 감지된다.
유리공의 숨 속에는 온갖 형상이 숨겨져 있다/ (중략) / 유리공의 더운 숨결을 먹고 / 꽃이 피고 벌 나비가 날아오른다 / 물병자리 별도 뜬다 / 숨결이 옮겨간 대롱 끝에서 / 새가, 구름이, 천사의 날개가 부풀어 오른다 / 유리공의 목구멍은 / 생명의 배출구이자 투입구 _「유리공을 위한 시」 부분
마치 조개가 내부에 든 모래알의 이물감을 진주로 빚어내듯 배영옥 시들은 불협화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찾은 듯싶다. 인위적으로 그것들을 고르게 하기보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듯이 “시간을 손꼽아 헤아”린다(「시인의 말」). 그 기다림 끝에 그녀가 비로소 “온갖 형상”이 숨겨진 유리공의 숨으로 아름다운 조형들을 빚는다. 숨에 녹아진 과거의 연대기들은 ‘간격’을 형성하고, 서서히 형체를 이루어간다. 반대로, 유리의 형질상 혹 그것이 깨지기라도 하면 면면이 품고 있는 무수한 서슬의 실체는 곧 드러나고 만다. 여기서 ‘간격과 균열’을 동시에 품은 배영옥 시들에 왜 물기가 어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배영옥의 시들은 우리를 적신다. 분열되거나 파편화된 자아의 상태를 이미지로 보여주기만 하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문법이 아닌, 연민을 자아내는 이 같은 ‘스밈의 언어’는 독자로 하여금 갱신된 서정시의 현장을 경험하게 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시가 뭇별처럼 총총히 빛나는 이유이다.
■ 추천의 글
배영옥의 시편들에는
오래 침묵하며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자의
무지근하고 골똘한 무게감이 있다.
자연스레 그 언어는
수화처럼 때로 적막한 듯하지만
오히려 이면과 행간이 깊고 넓다.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어머니는
‘차고 맑은 우물 속에 뜬 고봉밥그릇’ 같은
만월로 말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흔적이나, 주름, 혹은 그림자나
물 빠져나간 자리, 유산, 벽돌 한 장 같은
삶의 세목(細目)들을 통해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과
사유에 바쳐지는 그 언어들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이거나
입술을 깨문 속울음처럼
응축된 마음의 저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의 시들이
밤하늘의 뭇별처럼 총총,
세상으로 터져 나와서는
죽음과 소멸이란 필연의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몸짓 같기를 바란다.
엄원태(시인)
배영옥_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매일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현재 ‘천몽’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1부] 그림자 | 한순간 | 여운에 기대다 | 흔적 | 연꽃 | 만월 | 물북 | 링이 있는 풍경 |유산 | 상가(喪家)에서 | 먹구렁이가 담장을 넘던 날 | 바퀴는 무럭무럭 자란다 | 똥개 | 노랑어리연꽃 | 수화 | 풀밭 위의 악몽 | 유리벽의 독서 | 손바닥 거인 | 벽돌 한 장 | 성묘 [제2부] 칠성 장의사 |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 바퀴를 경배하라 | 유리공을 위한 시 | 유쾌한 성묘 | 고장 난 풍금 |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 욕설의 기억 | 측백나무 검푸른 잎들 | 웃음의 왕국 | 치매 | 공복 | 카멜레온 | 주름 | 푸른 방 | 물은 결코, | 마지막 외출 [제3부] 아, 하고 입 벌리고 다무는 사이 | 무량사 가는 길 | 시넨시스 화석 | 전선 위의 평화 | 수레국화 | 순간의 유배 | 야유회 | 오후 두시의 콘서트 | 언제나 지척에 있다 | 너무 캄캄한 지척 | 사시(斜視) | 한 생애가 간다 | 스쿠터가 간다 | 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 안부 | 그래서 새는 | CCTV | 오늘처럼 해설 - 권채린 시인의 말
남은 자들의 그리움과 괴로움, 갈증 ―― 송용창 기자, 한국일보(201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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