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詩歷) 20여 년의 중견 시인 오성호 교수가 시론집을 출간했다. 서문을 통해서는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동안 느껴왔던 아쉬움에서 출발하였다는 소박한 소회를 밝히고 있으나, 400쪽 분량에 담긴 내용은 단순한 시론집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 『서정시의 이론』은 사물과 세계의 진실한 모습을 담아내는 동시에 시대와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로서의 시쓰기를 위한 테마 비평집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플라톤에서 김우창, 한시에서 현대시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시각과 관점으로 시세계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 오래된 물음에 대한 대답의 어려움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공자의 『시경』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에 관한 논의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논의마저도 실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시들을 정리하고 분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정리된 시의 본질, 속성, 정의들도 논자에 따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을 보면 범박하게 말해, 선자들의 논의가 당대를 살며 시를 쓰고 읽는 이들에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이를 두고 저자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실패의 역사”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시라는 것 자체가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어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시의 속성이 이미 내려진 정의의 틀 속에 갇혀 있기보다는 끊임없이 그로부터 탈주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서 굳이 저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무수히 많은 물음과 끊임없는 대답의 시도들이 증거라면 증거다. 그러나 저자는 또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일단 시에 대한 정의를 유보한다고 해서 우리가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며 단지 시에 대한 관념들이 개별 작품들에 대한 독서 체험, 혹은 문학 교육과 무관하게 선험적으로 체득된 채로 머릿속에 어수선하게 적체되어 있을 뿐이라고. 그리하여 저자는 20여 년 ‘시’를 쓰고 읽고 또 ‘시’를 가르쳐온 경험을 반추하며 “시란 무엇인가”라는 그 오래된 물음에 대한 어려운 대답을 시도한다.
언어와 시의 질서, 그리고 이들의 잠재적 교란자로서의 시인
시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언급으로 서두를 열고 있는 『서정시의 이론』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 해당되는 1장부터 3장까지는 시와 시 작품, 시와 언어의 관계, 그리고 시의 언어가 어떻게 사물과 세계를 구체화하는가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1장에서는 주로 시와 작품의 관계를 다루면서 작품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해명하였으며 2장에서는 시가 본질적으로 언어와 존재의 일치를 꿈꾸는 데서 출발하며 시의 언어가 지닌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외적 특징은 결국 이 도달 불가능한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안간힘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시의 언어가 어떻게 사물의 구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2부에 해당되는 4, 5, 6장에서는 리듬, 비유, 상징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4장에서는 리듬의 기원과 기능을 다루는 한편, 리듬이 체험을 시간적으로 질서화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5장에서는 은유와 환유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6장에서는 상징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과 함께 시적 상징의 여러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3부에서는 시인과 시의 관계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먼저 7장에서는 시인을 보는 관점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개관함으로써 시인과 시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려 했다. 8장에서는 편협하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시인의 주관성이 어떻게 그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또한 시인의 주관성을 직접적 주관성과 창조적 주관성으로 구별하고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가기 위한 지적․윤리적 노력이 좋은 시를 쓰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임을 강조하였다. 마지막 9장에서는 시인의 창조적 주관성이 작품 속으로 외화(外化)되는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특별히 3부의 내용은 저자 자신이 시인이자 시를 가르치는 전문독자라는 점에서 일목요연한 논의와 비판이 빛을 발한다.
일찍이 플라톤에 의해 이상적인 국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추방되어야 할 존재로 지목되었던 ‘시인’이기 위해서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아닌 다른 것들로 스스로를 채우는 존재”인 동시에 채워야 할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 포용할 수 있도록 항상 스스로를 비우고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의미 깊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고착된 모든 질서들을 끊임없이 교란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성호
1957년 강원도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20~30년대 한국시의 리얼리즘적 성격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연구서 『한국근대민족문학사』(공저), 『문학과 사회』(공저), 『북한문학사』(공저), 『한 근대주의자의 행로-김동환론』과 시집 『별이 뜨기까지 우리는』, 『가시나무 그늘 아래서』, 『빈집의 기억』이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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