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가 작고한 지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그의 시제(詩題)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되새김질되곤 한다. 그러나 그 시제가 반영하는 과거처럼 암담하고도 참담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주 말해온 그의 시구는 이제 오히려 시대 현상을 추상적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퇴색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그 시제를,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여기 있다. 때로는 열정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윤리라는 이름으로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는 고독한 길을 걸어온 비평가 하상일. 비평가의 길에 들어선 지 만 10년째, 그는 네번째 평론집 책머리에 “‘서정의 미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선언한다.
비평가에게 윤리란 무엇인가? : ‘미래파’에 대항하여
최근 우리 시단에 ‘서정시’를 가장한 괴물 혹은 유령이 출현했다. 외양을 요모조모 따져보고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아도 전혀 ‘서정시’를 닮지 않았는데도 여기저기에서 그들을 일컬어 ‘서정시’라고 주장한다. 자신들도 이러한 명명은 다소 궁색하다고 여기는지 은근슬쩍 ‘다른 서정’이니 ‘불행한 서정’이니 하는 말로 쏟아지는 비판과 의심을 피해가려 한다. 가뜩이나 알쏭달쏭 외계어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단에, 덩달아 이러한 외계어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미래파’라는 멋진 수사를 달아주기에 분주한 자기중심적 비평의 한계를 철저하게 성찰해야 한다. 시도 읽혀야 하고, 비평도 읽혀야 한다.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우리 시문학의 오만한 권위의식을 청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서정의 옹호’가 절실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책머리에_ 5 "미래파 詩, 난해한 장막 걷어내야" ―― 이상헌 기자, 부산일보(2008. 1. 30.)
_ 「‘다른 서정’과 ‘다른 미래’」 중에서
2000년대 각종 문예지들은 앞 다투어 ‘미래파’에 대한 비판적 조명을 계속했고 좌담을 열기도 했다. 저자는 바로 그 끊이지 않는 쟁점 ‘미래파 논쟁’을 되짚고 있다.
시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갈 것이라며 등장한 일군의 시인들은 “이전 세대의 낡은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고, 언어와 사물의 경계를 허물고, 환상과 현실 사이로 난 미궁 속을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 ‘미래파’ 시인들의 캐치프레이즈가 ‘다른 서정’임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을 강조함으로써 또 다른 시적 권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즉, ‘미래파’의 선전(善戰)이 가능했던 것은 우연히도 ‘그렇게 나누어 부를 만한’ 다수의 시인들이 출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을 ‘미래파’로 명명하는 비평가들의 권력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_ 「‘다른 서정’과 ‘다른 미래’」 중에서
우리 시, ‘다른 미래’는 가능한가? : 서정에의 옹호
저자는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현 문단의 유행 바깥에서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고 있다. 이 물음은 곧 ‘서정에의 옹호’로 이어진다. 1990년대 초 서정시의 위기를 거론하던 시절 ‘서정성의 회복’이 담론화되었던 것처럼, 저자는 다소 보수적으로 전통에의 회귀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저자는 “자연의 내면화나 선(禪)적 포즈에 바탕을 둔 ‘진부한 서정’의 양상”에 대한 비판 역시 늦추지 않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 사회에서 자연을 내면화하는 선적인 포즈는 오히려 “인공적 서정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서정의 실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문제를 내면화하고 사회의식을 간직한, 함께 살아가는 동료(너)를 동일화의 대상으로 삼는 소통의 문학이 아닐까? 그는 시의 다른 미래를 위해 ‘소통’의 의지를 붙안고 있는 서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서정’의 다른 모델을 제시하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서야 할 출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출발선에 비단 시인뿐 아니라 비평가, 더 나아가 독자도 함께 서야 한다는 당위적인 목소리는 그가 쓴 문장 사이에서 발견해야 할 우리의 몫이 아닐까.)
비평에 있어 윤리란 무엇인지를 자문(自問)하는 소수의 비평가 중 한 사람인 하상일. 그는 메타비평의 주체적 자아로 활동해온 지난 10년을 “해석과 분석에 골몰하기보다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을 확립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고백한다. 이 책은 그간의 메타비평을 모았을 뿐 아니라, ‘서정시를 읽기 힘든 시대’를 고민하는 비평가이자, ‘서정시’의 열렬한 독자로서의 글 역시 담고 있다.
꽃잎을 벤 칼날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했던가. 타락한 비평을 베는 매정한 칼날을 품은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이라는 꽃향기를 담고 있다.
하상일_ 1970년 부산 출생. 주요 저서로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 『주변인의 삶과 시』, 『전망과 성찰』 등, 공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한국문학권력의 계보』, 『비평, 90년대 문학을 묻다』, 『탈식민주의를 넘어서』, 『강경애, 시대와 문학』, 『2000년대 한국문학의 징후들』 등, 편저 『고석규 문학의 재조명』, 『소설 이천년대』 등이 있다. 현재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주간, 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2003년 제8회 고석규 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제1부 ‘시적인 것’에 대한 성찰
‘다른 서정’과 ‘다른 미래’_ 15
‘미래파’들의 ‘다른 서정’: 권혁웅, 이장욱의 시론에 대한 비판_ 34
황병승 현상과 미래파의 미래_ 58
서정의 본질과 미래: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의 시를 중심으로_ 75
시적인 것의 혼란과 윤리적 주체: 맹문재의 『책이 무거운 이유』와 노혜경의 『캣츠아이』_ 100
시의 기술, 시의 소통: 권혁웅, 김언의 시_ 117
제2부 서정의 현실
너무도 슬픈 너의 몸: 채호기, 황병승의 시에 나타난 ‘성적 소수자’를 중심으로_ 129
시의 뿌리, 시의 근원:박진성,『목숨』_ 148
동일성의 회복과 근원으로의 회귀: 윤중호, 『고향 길』_ 152
집에서 떠나온 길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손택수의 시세계_ 161
풍경에 대한 응시와 존재에 대한 성찰: 최영철의 『호루라기』와 유홍준의 『나는, 웃는다』_ 180
제3부 해석과 판단
비평의 소통과 미래_ 195
시의 미래를 사유하는 비평: 구모룡, 『시의 옹호』_ 213
세대론의 권위와 탈정치성의 오류: 이광호의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을 중심으로_ 221
해석과 판단, 비평의 윤리: 고봉준, 『반대자의 윤리』_ 240
시의 열정으로 충만한 죽음의 영원성: 우대식, 『죽은 시인들의 사회』_ 250
콜로노스 숲으로 들어간 비평: 강유정, 『오이디푸스의 숲』_ 256
제4부 소설의 진실
증언소설과 역사 바로 세우기: 김원일, 『푸른 혼』_ 269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 박종관, 「길은 살아있다」_ 276
진실과 현실 사이의 서사적 기록: 심윤경의 소설세계_ 287
고독한 일상의 우울한 욕망들: 천운영, 윤성희, 김윤영_ 299
억압된 내면의 진정한 자아 찾기: 한강, 이복구, 김연수의 소설_313
분단과 민족을 넘어 인간과 세계로: 조정래 소설의 현재성_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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