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매저키스트의 치욕과 환상―최승자론」으로 등단한 평론가 엄경희의 네번째 평론집 『숨은 꿈』이 나왔다. 섬세하고 냉철한 비평 세계를 펼쳐온 저자는 제목 ‘숨은 꿈’이 말하듯, 시인들의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꿈’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동시에 ‘밀경(密經)의 문’을 열어 각 시작품들 속에, 그 시작품들의 배면에 깔려 있는 시인의 삶 속에, 시작품들과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 숨겨져 있는 ‘꿈’의 해몽을 시도한다.
시혼(詩魂)의 뒤틀림 속에 숨겨진 꿈 읽기
1부에서는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중견시인들의 ‘숨은 꿈’을 보여주고 있다. 「남도(南道)의 푸른 말똥 냄새 ― 서정춘의 시세계」에서 저자는 시적 상황을 극도로 압축하고 있는 시적 이미지가 서정춘 시세계의 중심 요소라고 지적하며, 그것들이 모진 생활의 체험에서 비롯된 연륜의 형상이라 진단하고 있다. 「통천(通天)하는 길고 긴 뜨신 근(根) ― 문인수의 시세계」에서는 수많은 동사(動詞)들을 풀었다 감는 것을 반복하는 역동성이 문인수의 내적 운동태라 밝히고 있다. 「우울한 자기 확인의 서(書) ― 김명인의 시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떠돎이라는 생의 방식을 놓은 적이 없는 김명인의 시세계를 통찰하며 그의 떠돎이 완성할 수 없는 인생의 진실한 반영이라 말하고 있다. 「무일물(無一物)의 운명에 관한 명상 ― 최승호 시인론」에서는 집요하게 무일물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최승호의 시편들을 읽어가며 최승호의 숨은 꿈과 함께 침묵의 맛을 음미하고 있다. 「어느 실존인의 꿈과 외로움 ― 박상천의 시세계」에서는 차별에 의해 무수히 나누어진 불협화음의 세계로부터 연원한 동일성의 세계를 향한 박상천의 꿈을 해몽하며, 그의 시의 언어가 우리들의 조각난 꿈을 깁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기억한다, 바람의 궐기를 ―임동확의 시세계」에서는 모진 역사와 현실 앞에서 화해의 악수를 내밀지도, 그렇다고 초연해질 수도 없었던 임동확의 고뇌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리얼리스트로서의 저자의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낸 2부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거대담론의 붕괴와 탈이데올로기적 기류로 인해 시대의 난기류에 부딪힌 리얼리즘 시의 굴절∙변화∙지평의 확대를 살피고 있다. 저자는 지난 1980년대의 지배와 피지배의 차등구조가 분화되고 은폐되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리얼리즘 문학은 숨겨져 있는 적의 실체를 간파해야 함과 동시에 삶의 새로운 지평, 혹은 이념의 토대를 다시 형성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시영, 이상국, 백무산, 조기조, 박성우, 김기택, 최종천, 정병근, 박지웅, 우대식 등의 작품들이 기로 앞에 선 리얼리즘 시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또한 근래 시단의 논란이 됐던 ‘미래파’ 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행하고 있다. 저자는 자의식을 동반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만을 추구하는, 소위 미래파 시인들의 획일적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황병승, 김민정, 이민하, 김행숙 등 미래파 시인들의 시가 현실을 겉돌고 있는 것은 체험의 절실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도발적이고 기괴한 소재나 이미지를 발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젊은 시인들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한 대안 모델로 최승호, 박찬일, 박상순의 시에 나타난 시의 놀이적 측면에 관심을 쏟고 있다.
더불어 무비판적 모방∙생산을 되풀이하고 있는 미래파의 대두 속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일군의 서정시인들 또한 저자의 주된 관심 대상이다. 이들은 전통미학과 교감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창조 계승하고 있다. 문태준, 손택수, 이병률, 김경주, 고형렬, 문인수, 백인덕, 이대흠, 장석남 등의 시를 통해 2000년대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3부에서는 천양희, 정진규, 신달자, 신현정, 정용주, 이안, 안도현의 작품론을 펼치고 있다. 천양희에게서는 비천한 세계를 가로지르는 정신주의자로서의 숭고함과 진정한 소리꾼으로서의 면모를 발견한다. 정진규에게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심검(尋劍)과 같은 살아 있는 몸을, 신달자에게서는 경직된 페미니즘의 경향을 벗어난 몸에 대한 실존의식을 읽으며 노년 시의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신현정에게서는 극단의 존재론적 어둠을 극명(克明)의 유쾌함으로 바꾸는 시정신을, 정용주에게서는 삶의 신산함과 적막함을 견뎌내는 자유주의자의 꿈을 읽고 있다. 또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어조로 쓰여진 이안의 메타시 속에서 강렬한 자의식을 감지한 저자는 이것이 시를 생성케 하는 필연적 에너지원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서간체로 쓴 안도현 시의 작품론에서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작품 분석과 함께 자연에 관심을 기울이는 리얼리즘 시인들의 시적 행보가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생성하는 진통, 혹은 징후라고 예감하고 있다. 동시에 이념을 버리지 않는 서정, 시를 망치지 않는 이념의 상응을 꿈꾸고 있다.
196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985년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매저키스트의 치욕과 환상-최승자론」이 당선되어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한국시의 미학적 패러다임과 시학적 전통』(공저) 등이 있다. 현재는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부 심미적 반역
남도(南道)의 푸른 말똥 냄새—서정춘의 시세계 ● 9
통천(通天)하는 길고 긴 뜨신 근(根)—문인수의 시세계 ● 30
우울한 자기 확인의 서(書)—김명인의 시세계 ● 51
무일물(無一物)의 운명에 관한 명상—최승호 시인론 ● 71
어느 실존인의 꿈과 외로움—박상천의 시세계 ● 90
나는 기억한다, 바람의 궐기를—임동확의 시세계 ● 106
2부 쟁점과 비전
리얼리즘 시의 굴절∙변화∙지평의 확대—이시영∙이상국∙백무산의 경우 ● 129
가난을 재생산하는 자는 누구인가?—부조리한 경제구조에 저항하는 이 시대의 시인들 ● 146
우리들의 그늘진 왕국 ● 165
환상적 실험시에 대한 몇 가지 질문 ● 181
난독(難讀)의 괴로움을 넘어서 독자는 무엇을 얻는가?—황병승 시 자세히 읽기 ● 198
말∙놀이∙진실 ● 217
차이와 반복으로 빚어낸 2000년대 서정의 스펙트럼 ● 234
좋은 서정과 진부한 서정 ● 249
전통 미학과 교감하는 시인들 ● 265
3부 영원한 생성
바람으로 일어서는 생의 곡선—천양희 시집『너무 많은 입』● 285
실존의 기표로서 몸—정진규 시집『껍질』, 신달자 시집『열애』● 300
유쾌한 극명(克明)의 세계—신현정 시집『자전거 도둑』● 313
얼음의 시간을 건너가는 음악의 쪽배—정용주 시집『인디언의 ?子』● 333
메타시에 담긴 자의식과 고뇌—이안 시집『치워라, 꽃!』● 355
안도현 시인께 ● 372
작가의 말 ●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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