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수의 열정이 만들어낸 김삿갓 문학의 결정판
김삿갓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시를 내용상의
특성별로 정리하여 묶은 책.
김삿갓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응수가 생전에 행한 작업의 결정판으로, 남한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풍자시인
김삿갓을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이응수는 8.15 후에 북한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우리는 분단의 장벽으로 말미암아 일제하에 펴낸
‘김립시집’만을 흔히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후 더 많은 자료수집과 연구를 거듭한 이응수가 김립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김삿갓 풍자시 전집』은 시 하나하나에 대한 번역뿐만 아니라 김삿갓에 대한 최고 권위자다운 해석으로 참다운 이해의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불운한 방랑시인 김삿갓의 풍자시 탄생 배경
김삿갓(金笠)은 19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걸치는
시기에 허름한 삿갓을 쓰고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양반 귀족들의 부패상과 죄악상, 비인도성을 폭로 풍자한 방랑시인이다.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號)는 난고(蘭皐). 6세 때 홍경래의 난으로 삼족이 멸하는 처지에 놓이자 종이었던 김성수가 구사일생으로 그를 구출,
황해도 곡산에서 키웠다. 김립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백일장에서 장원이 되었으나 신분이 드러나 급제가 취소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22세부터 방랑을 시작하여 40년 간 방랑을 계속, 그의 시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도주의적인 감정과 평민 사상에 기초하여
지배층에 대해서 강한 반항정신을 나타낸 그의 시는 표현형태가 다양하여 많은 서민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김삿갓은 1864년 3월 29일
전라도 동복의 한 농가에서 58세를 일기로 객사하였는데, 그의 시는 과거를 볼 때에 필수 참고서처럼 읽혔다고 전해진다.
『김삿갓 풍자시 전집』의 구성
『김삿갓 풍자시 전집』의 내용은,
김립에 관한 문헌/김립이 활동한 시기의
사회환경/김립의 사상과 그의 경향/김립 문학의 내용상 특성: 1)인도주의 사상과 평민 사상을 표현한 작품들, 2)풍자시, 3)영물시(詠物詩),
4)자연 풍경시와 향토시, 5)연정시(戀情詩), 6)과시(科詩)/김립의 시 형식/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吉州吉州不吉州
許可許可不許可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魚
좋은 고을 길주라 하나/ 조금도 좋은 고을이 아니어서/ 허가가 많이 사나/ 과객을 허하는
집 하나도 없다.
밝은 강 명천이란 지방에/ 사람은 전혀 밝지 못해서/ 고기밭이란 어촌에/ 고기란 꼬리도 볼 수 없다.
위의
내용은 이 책에 실린 「길주 명천」이란 시의 전문이다. 지방에 허가(許哥)가 많이 사는바, 이 지방에는 옛날 과객을 재우지 않는 악습이 있었다.
그래서 김립은 그 악습을 길주(吉州), 명천(明川), 어전(漁佃), 허가(許哥) 등의 지명과 지방적 특산물에 결부하여 조롱한 작품인데 음을 따라
읽는 맛이 빼어나다.
이번에 펴내는 『김삿갓 풍자시 전집』은 1956년판 『풍자시인 김삿갓』(평양 국립출판사 刊)을 그대로
담아낸
것으로서, 이를 펴낸 이응수는 1909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나 경성제대를 졸업하였다. 8.15 후 북한에서 문학사를 집필하기도 하면서
김삿갓 연구를 비롯하여 많은 연구활동을 하다 1964년에 작고하였다.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안으로 서는 시대
김삿갓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시대비판적인 풍류객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김삿갓의 빼어난 시를 접해 본 사람은 드물다. 그저 옛날이야기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김삿갓의 전부이다. 우리는 서구적 체계와 인식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뿌리는 진부한 것
양 괄호 안에 묶어 두는 일이 허다하다. 괴테와 셰익스피어를 찬양할지언정 우리의 숨결이 살아있는 시문학은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삿갓의 漢詩들은 또 어떠한가? 거침없는 목소리의 김립 시들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씻어주는 힘이 되었다. 김삿갓의 시를
재조명함으로써 우리의 풍자시가 얼마나 빼어나고 날카로운지 새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김삿갓(金笠)
19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걸치는 시기에 허름한
삿갓을 쓰고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양반 귀족들의 부패상과 죄악상, 비인도성을 폭로 풍자한 방랑시인.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號)는 난고(蘭皐)이다. 6세 때 홍경래의 난으로 삼족이 멸하는 처지에 놓이자 종이었던 김성수가 구사일생으로 그를 구출, 황해도 곡산에서
키웠다. 김립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백일장에서 장원이 되었으나 신분이 드러나 급제가 취소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22세부터 방랑을 시작하여 40년 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읊은 그의 시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 인도주의적인 감정과 평민 사상에 기초하여
지배층에 대해서 강한 반항정신을 나타낸 그의 시는 표현형태가 다양하여 많은 서민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볼 때는 필수
참고서처럼 읽혔다고 한다. 1864년 3월 29일 전라도 동복의 한 농가에서 58세를 일기로 객사하였다.
이응수
정리
1909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나 경성제대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사를 집필하기도 한 이응수는 일제 강점하에서
전국 각지를 답사하면서 김삿갓의 시를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토대로 1939년에 『김립시집』을 발간하였따. 이후 더 많은 자료수집과 연구를
거듭하여 북한에서 『풍자시인 김갓갓』을 출간하였고, 이 책의 모태가 되었다. 1964년 작고했다.
김립에 관한 문헌
김립이 활동한 시기의
사회환경
김립의 사상과 그의 경향
김립 문학의 내용상 특성
1)인도주의 사상과 평민 사상을 표현한
작품들
2)풍자시
3)영물시(詠物詩)
4)자연 풍경시와 향토시
5)연정시(戀情詩)
6)과시(科詩)
김립의 시 형식
'김삿갓 풍자 시전집' 국내 첫 발간
‘세상사람이 다
부자만 따라가고/ 가난한 사람을 좇으려 안하니/ 누가 산촌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차고 여윈 사람을 기억이나 하겠나/ 그러나 하늘 자연만은 빈부의
차이를 둠이 없이/ 이 오두막살이 띠집에도/ 따뜻한 봄빛을 골고루 보냈구나’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풍류시인 김립(金笠. 본명
김병연(1807~1864)은 한시 ‘빈금’(貧昑. 가난한 살림)에서 빈자를 냉대하는 세태를 한껏 조롱하고 풍자했다. 그는 또
‘양반시비’(兩班是非)라는 시에서 ‘너희 무리(양반)가 인간의 진짜 무리를 싫어하는 것을 보니/ 이 나그네 반(班)은 너희들의 정체와 진가를
짐작할 수 있다’고 읊으며 봉건제도의 폐해와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김삿갓 풍자시전집’은
삿갓을 쓰고 조선 팔도를 방랑하며 양반들의 부패상을 풍자한 조선의 방랑시인 김립의 삶과 사상, 시세계를 한눈에 살필 수 있게 해준다. ‘풍자시’
‘영물시’ ‘자연 풍경시와 향토시’ ‘연정시’ ‘과시(科詩)’ 등으로 나눠 김립이 지은 한시 95수를 싣고 있는 이 책은 국내에서 첫 출간된
‘김립 시전집’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평생 김립의 문학세계를 연구했던 북한의 문학사가 이응수(1909~1964)가
1956년 평양 국립출판사에서 펴낸 ‘풍자시인 김삿갓’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책은 김립의 최고 권위자가 쓴 ‘정본’인 셈이다. 함경남도
고원 출신인 이응수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주로 북한에서 활동하며 1939년 ‘김립시집’을 발간, 김립의 존재를 알린 첫 학자이다. 해방 이후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기도 한 그는 김립을 “인도주의 사상에 기초해 지배층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을 드러낸 걸출한 시인”으로 평가했다.
6살 때 평안도 선천의 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 투항함으로써 삼족이 멸할 처지에 놓였으나 몸종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한
김립은 어릴 적부터 시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20살 때 빼어난 글솜씨로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신분이 드러나 급제가 취소되자
방랑길에 나섰던 그는 22살때부터 ‘떠돌이 시인’으로 살며 통치계급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드러냈다.
그에게 삿갓은 지배세력과
부패한 사회질서에 대한 하나의 투쟁무기였다. 늘상 비스듬히 삿갓을 쓰고 다녔던 그는 ‘영립(詠笠)’이란 시에서 ‘속된 자의 의관이란 다 외식일
뿐/ 오로지 이 삿갓을 쓰고 있을 때/ 온 천지 풍우 근심이 없다’고 읊었다.
--- 경향신문 박구재 기자 (2000년 2월 22일
화요일)
김삿갓 풍자시, 반항과 해학의
민중문학
‘일출원생원(日出猿生員)/황혼문첨지(黃昏蚊?至)/묘과서진사(猫過鼠盡死)/야출조석사(夜出蚤席射)’.해뜨면 원숭이가
들에 나가고/저물면 모기가 처마에 모인다/고양이가 지나가니 쥐가 모두 죽고/밤이면 벼룩이 나와 쏘아댄다.별것 아닌 직분을 뽐내는 지방 토호들을
조롱한 한시(漢詩) ‘원생원(元生員)’이다.방랑시인은 원씨 성의 생원(生員)을 원숭이에,서씨 진사(進士)를 쥐에 빗대 양반 사회를
비꼬았다.
시인 김립(金笠.김삿갓.1807~1864).본명 난고 김병연(金炳淵).명문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조부가 홍경래
농민군에 항복한 죄로 폐족당한 뒤 종의 손에 자랐으며 출신 때문에 타고난 문재(文才)를 펼치지 못하고 22살 이후 40년 동안 팔도를
떠돌았다.조선 후기 양반 사회에 대한 반항과 울분을 특유의 해학으로 쏟아낸 그의 풍자시는 이런 불운을 배경으로 했다.
입으로
전해지던 김삿갓 시를 발굴, 빛을 보게 한 사람은 북한 학자 이응수(1909~1964)다.우리가 알고 있는 김삿갓에 관한 일화와 해석은 모두
그의 연구에 빚졌다.국내 김삿갓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응수의 해설서 ‘풍자시인 김삿갓’(1956년)이 반세기만에 ‘김삿갓 풍자시
전집’(실천문학)이란 제목으로 정식 출간됐다.저자는 김삿갓의 시를 형식적으로 한시 전통의 파괴, 내용적으로는 기존 봉건질서에 대한 반대를 담은
민중 문학으로 규정했다.또 후대의 창가, 현대 자유시로 나가는 관문에서 한문으로 씌어지긴 했지만 한시의 전통이 아니라 19세기에 성행하던
사설시조나 잡가 계열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특유의 유머에 대해서도 높이
평했다.‘매봉원빙쇠안(每逢元字憑衰眼)/첩도순배적백수(輒到巡盃籍白鬚)’.자격을 갖추지 못한 시골 훈장들의 허위의식을 ‘매양 모를 글자를 보면 눈이
어둡다 빙자하다가도/문득 술잔이 돌면 나이가 많다고 먼저 마시면서’라고 비웃은 ‘조산천훈장(嘲山川訓長)’의 뼈있는 웃음이 그런
것.
한자와 한글을 교묘하게 배치해 뜻을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도 김삿갓 시의 묘미다.‘무제시(無題詩)’라는 작품에서는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사십가중오십식(四十家中五十食)/인간기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불여귀가삼십식(不如歸家三十食)’ 라고
읊었다.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에게/망할 놈의 집에서/쉰 밥을 준다/인간 세상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차라리 돌아가 선 밥을 먹으리라는
의미.김삿갓은 ‘삼십, 사십, 오십, 칠십’이란 시어 속에 ‘서러운(서른), 망할(마흔), 쉰(쉰), 이런(일흔)’이란 뜻을 숨겨 배고픈
나그네를 쫓는 박정함과 자신의 방랑 인생에 대한 자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저자가 김삿갓의 문학을 높게 친 또 다른 이유는
사실주의적 색채.김삿갓의 시는 요강, 담뱃대, 돈, 머리카락, 벼룩 등 작은 소재뿐만 아니라 자연 경관을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려내 관념적인
양반문학과 구별됐다.한평생 김삿갓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김삿갓의 문학에서 우아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리석다.중요한 것은 양반과
봉건체제에 대한 조롱과 이를 드러낸 형식의 조화이다.김삿갓의 시는 당시 중류 이하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며 하나의 시풍을
형성했다”
--- 국민일보 이영미 기자 (2000년 2월 21일 월요일)
봉건질서 부정한 김삿갓의
문학세계
“해뜰 제 원숭이가 들에서 나고/황혼에 모기가 처마에 이르렀다./고양이가 지나가니 쥐가 모조리 다
죽었고/밤에 벼룩이 자리에 나와 따갑게 쏜다.”
뭇 동물과 자연을 노래한 것 같은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일까.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 원문을 읽어 보아야 한다. “日出猿生員 黃昏蚊첨(#竹 아래 詹#)至 猫過鼠盡死 夜出蚤席射”
<원생원(元生員)>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생원이니 첨지니 진사니 석사니 하며 서로 아옹대는 지방 토호들을 원숭이,
모기, 쥐, 벼룩 따위에 빗대어 야유하고 있다. 국회의원과 장.차관 등을 역시 원숭이 등에 빗댄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김삿갓'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김병연(1807~64)의 작품이다.
재북 문학사가 이응수가 1956년에
낸 <풍자시인 김삿갓>(평양 국립출판사)이 <김삿갓 풍자시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김삿갓의 한시 95편을
주제별로 분류한 다음 주석과 해설을 덧붙였다. “봉건사회의 최종적 임종기”인 19세기를 살며 봉건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시대 정신을 시로
표현한 김삿갓의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 (2000년 2월 22일 화요일)
바람따라
떠돌던 방랑시인의 날카로운 풍자가 놀랍구려
김삿갓(金笠). 19세기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삿갓을 쓰고 돌아다니며 당시
양반귀족의 부패상, 죄악상을 풍자적인 시로 폭로했던 방랑시인. 그의 생애와 그가 남긴 시를 한 자리에 모은 「정본(正本) 김삿갓 풍자시 전집」이
실천문학사에서 발간됐다.
이 책은 당초 1956년 북한 평양 국립출판사에서 「풍자시인 김삿갓」이란 제목으로 출판됐던 것. 경성제대
조선어과 출신으로 일제하 전국을 답사해 김삿갓의 시를 수집, 1939년에 「김립 시집」을 발간했던 이응수(李應洙 1909~1964)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문학사 연구를 하면서 자신의 김삿갓 연구 결정판으로 내놓았던 책이다. 「김립 시집」은 해방 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고, 1956년의
북한판도 2만부나 발행됐을 정도였다. 김삿갓이 우리 민중들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된 인물인가 하는 것이 실증된 셈이다.
「吉州吉州不吉州(길주길주부길주) 許可許可不許可(허가허가불허가) 明川明川人不明(명천명천인불명) 漁佃漁佃食無魚(어전어전식무어)」
「길주 명천」이란 김삿갓의 시의 전문이다. 「좋은 고을 길주라 하나 조금도 좋은 고을이 아니어서/허가가 많이 사나 과객을 허하는
집 하나도 없다/밝은 강 명천이란 지방에 사람은 전혀 밝지 못해서/고기밭이란 어촌에 고기란 꼬리도 볼 수 없다」. 함경북도의 길주, 명천 지방에
허가(許哥)가 많이 사는데 이 지방에는 옛날 과객을 재우지 않는 악습이 있었다. 김삿갓은 그 악습을 지방 이름과 지방 특산물인 고기(漁佃.
어전은 동리 명칭이자 고기밭이라는 의미)에 결부시켜, 절묘한 음률의 풍자시를 만든 것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다. 1807년 당시 제일의 명문세가이던 장동(壯洞) 김씨 김익순(金益淳)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여섯살 되던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선천(宣川) 방어사로 있던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 난 후 김익순은 참형을 당하고 일가는 페족된다. 김병연은
집안의 종에 의해서 키워져 일찍 천재적 재능을 보였으나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고도 신분이 밝혀져 취소된다. 그는 이후 22세 때 집을 나와
1864년 전라도 동복(洞福)의 한 농가에서 객사할 때까지 40여년간 방랑생활을 한다. 이러한 개인적 곡절에서 비롯된 지배층 및 당시의 봉건적
사회구조에 대한 반항, 인도주의적 평민사상에 기초한 그의 시는 당시 조선 전국의 민중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과거에서도 필수 참고서처럼
읽혔다고 한다.
1982년 강원 영월군에서 그의 묘와 집터가 발견돼 지금은 이 지역에 묘비와 시비, 유적비가 서 있다.
KBS라디오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한국의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김삿갓의 삶과 시에 자신의 문학관을 반영한 장편소설
「시인」을 썼고 이 작품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됐다.
--- 한국일보 하종오 기자 (2000년 2월 21일
월요일)
풍자시인 감삿갓 제대로 알기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서른) 나그네에게 망할(마흔) 놈의 집에서 쉰 밥을 준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으랴. 차라리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라.’
한국 역사상 최고 풍자시인의 칭호를 받아 마땅한 ‘삿갓’ 김병연. 오늘날
우리가 그의 진면목을 접하는데 이응수라는 인물의 노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응수는 일제 강점하에서
전국 각지를 답사하면서 김삿갓의 시를 수집했고, 이를 토대로 1939년 ‘김립시집’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이 낯선 것은 그가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했기 때문. 그는 연구와 자료 수집을 계속해 56년 ‘풍자시인 김삿갓’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담아냈다.
김병연 연구의 필수적
자료로 여겨지는 ‘풍자시인 김삿갓’이 ‘김삿갓 풍자시 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서두에 김병연이 처했던 사회적 환경과 시의 경향을 분석한
글을 싣고, 그의 시를 ‘평민 사상을 표현한 작품’ ‘풍자시’ ‘자연 풍경시와 향토시’ 등 여섯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 원문과 번역문, 해설을
실었다.
시인으로서도 활동했던 이응수의 유려한 번역문은 남북한 양쪽에서 김병연 번역의 전범으로 꼽혀왔다.
---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 (2000년 3월 11일 토요일)
기라성 같은 조선시대 문인들 중 김삿갓이 눈에 띄는 까닭은
뭘까
조선시대를 통틀어 일세를 풍미했던 문인들이 기라성 같을 터이나, 그중 유독 매월당 김시습과 교산 허균, 그리고 난고
김병연이 눈에 띄는 까닭은 그 만만치 않은 삶의 이력 때문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매월당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의해 일생동안 초야를
떠돌며 살았고, 허균은 광해조때 아예 이씨조선 자체를 뒤엎어버릴 모반에 동참했다가 본인은 능지처참을, 그리고 일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김병연은 할아버지의 홍경래의 난 연루로 일족이 멸문당할 때에 종의 품에 안겨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자라 평생 구름 속을 떠돌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그들의 글에 깊은 그늘이 없을 수가 없을 터이다.
김병연은 22세때 집을 나서 58세로 객지에서 병사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떠돌며 방랑자로, 불평객(不平客)으로 일생을 보냈다. 평생 삿갓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나 후세나 그를 일컬어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으로 부르고 있다.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거늘/ 돌아보매 나 홀로 평생에 뜬 몸이라/ 짚신 지팡이로
수천리를 걸으며/ 물 성품 구름 마음으로, 사방이 다 내집이었다…’(자전적 내용을 담은 ‘난고의 평생시’ 중에서)
이렇게 떠돌면서
그는 때로 남의 문간방에서 자기도 하고, 때로는 동네 서당에 머물기도 하면서 수많은 시편들을 남겼다. 그는 한자의 글뜻과 우리말의 말뜻을
절묘하게 구성하여 얼른 들으면 욕 같은데 한문의 뜻으로 새겨 읽으면 깊은 의미가 담긴 통렬한 풍자시를 많이 남겼다. 말하자면 평민문학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록이 정확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평생 떠돌이로 다녔던 처지인지라 그의 시는
비바람 속에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었을 터이다. 그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치 전설처럼 떠돌며 구전되었으니 지방마다 김삿갓이
남긴 시라 하여 그의 일화와 함께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를 평생동안 모으고 집대성한 이가 바로 월북한 문학사가 이응수이다.
이응수는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나서 일제강점기 전국을 돌아다니며 김삿갓이 남긴 시를 모아 1939년 처음으로 ‘김립 시집’을
내었다. 그후에도 계속 자료를 모아 마침내 1956년 ‘풍자시인 김삿갓’으로 집대성했다. 이로써 가히 ‘해동의 두보’라고도 칭해질 수 있는 그의
시가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우리 속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 경향신문 깊이읽기 김영현(소설가) (2000년 2월 29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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